[민경훈칼럼] ‘공화국’과 ‘바나나 공화국’

민경훈 LA한국일보 논설위원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18 May 2017


1973년 10월 20일 리처드 닉슨은 엘리옷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아치볼드 칵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지시한다. 리처드슨이 이를 거부하고 사임하자 닉슨은 윌리엄 러클하우스 부장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지시한다. 러클하우스가 이를 거부하고 사임하자 닉슨은 로버트 보크 차관을 불러 특별검사 해임을 지시한다. 보크는 이를 받아들여 특별검사를 해임한다. 이 사태가 토요일 밤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민주당 지도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잡힌 이들이 백악관과 연관이 있는지 여부를 파헤치기 위해 임명된 칵스 특별검사는 닉슨에게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가 백악관에서 벌어진 일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제출할 것을 명령하자 닉슨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더 이상 이를 방치했다가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판단한 닉슨은 칵스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이는 결국 부머랑으로 돌아왔다. 닉슨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처음으로 반대를 넘어섰고 연방 상하원에서의 탄핵이 확실시되자 닉슨은 결국 다음해 8월 사임했다. 칵스 해임과 함께 닉슨의 운명도 결정된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돌연 자신의 러시아 커넥션을 수사하고 있던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을 해임한 것이다.

백악관은 코미가 작년 힐러리 클틴턴 이메일을 수사하면서 클린턴 불기소를 건의하는 등 FBI 국장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를 했다며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과 라드 로젠스타인 부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트럼프가 그를 해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트럼프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트럼프는 작년 대선 직전 코미가 힐러리 이메일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자 그가 “배짱있는” 인물이며 이번 결정으로 “명예를 회복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백악관으로 불러 찬사를 늘어놓았고 불과 2주전에도 백악관은 트럼프가 코미를 전폭적으로 신임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힐러리 이메일 때문에 코미를 해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트럼프 본인도 NBC 와의 인터뷰에서 법무장관과 부장관의 건의와 관계없이 코미를 해임하려 했다고 밝혀 백악관의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가 보다.

그는 또 코미가 “잘난 척 하는 인물”이며 FBI 직원들의 신뢰를 잃었다고 주장했는데 잘난 척을 도널드만큼 하는 인물은 미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코미 해임으로 권한 대행이 된 앤드루 맥케이브는 코미가 지금도 FBI 직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며 도널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도널드는 또 자신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조작된 이야기”라고 밝혀 코미 해임이 러시아 커넥션 수사와 관련이 있음을 사실상 실토했다.

트럼프가 코미를 해임함으로써 러시아 커넥션 수사를 잠재우려 했다면 이는 미국 역사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오산이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 정보국장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한 것도 문제지만 내부적으로도 민주주의 제도가 공격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칼 번스타인은 이번 사태가 워터게이트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하버드의 로렌스 트라이브 로스쿨 교수와 작년 트럼프 당선을 예측했던 앨런 릭트먼 교수도 연방의회는 사법 방해를 저지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를 탄핵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각계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직 폴 라이언 연방 하원의장과 미치 맥코넬 연방 상원 다수당 원내총무는 특별검사 임명이나 탄핵 절차 개시에 소극적이다. 트럼프가 탄핵으로 쫓겨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 돼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경우 의료 개악과 부자 감세 등 공화당의 주요 법안 제정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의 건국이념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는 기관의 장을 마음대로 자르는 것을 허용할 경우 미국은 ‘공화국’이 아니라 집권자가 국가를 개인 소유물처럼 가지고 놀다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하는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공화당 지도부는 무엇이 역사와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