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 한국전을 돌아본다(1)

목숨 걸고 한국 지켜준 티보 루빈



  • 편집국 (editorial@koreatimes.net) --
  • 18 May 2017

24시간 혼자 고지 사수해 퇴각로 확보 기관총 탄환 떨어질 때까지 싸우기도 포로 시절 음식 훔쳐 동료 먹여살려 롱비치 보훈병원 ‘루빈센터’로 개명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은 1953년 7월27일 휴전될 때까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비극이었다. 한국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국군 전사자(실종자 제외)는 13만7,899명이었으며 UN군 전사자는 4만670명이었다. 북한군 사망자는 5만여 명, 중공군 사망자는 13만5,600명으로 추산됐다.

본보는 한국전 67주년을 앞두고 당시 활약한 군인들, 역사적인 전투 등을 돌아보는 기획 시리즈를 소개한다.  

 

티보 루빈.jpg티보 루빈(Tibor Rubin·사진)은 1929년 6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지역에는 유대인 120가족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구두제조공, 형제는 6명이었다.

그가 13살이 되자 부모는 그를 유대인에게 자유로운 스위스로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붙잡혀 오스트리아의 마우타우센 유대인수용소에 감금됐다. 14개월 후 제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이 진주하면서 그는 자유의 몸이 됐다. 미군이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그도 개스실에서 독살당했을 것이다.

그의 부모와 두 여동생은 모두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으로 헝가리에서 죽었다(홀로코스트). 아버지로부터 남을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어려서부터 배운 그는 생명의 은인이 된 미군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했다.

루빈은 2015년 12월 캘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에서 86세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

그는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전장을 떠난 지 55년 만이었다. 전투 중 여러 번 공을 세웠기 때문에 진작 표창을 받아야 옳았으나 유대인 혐오자인 상관이 그를 추천서에서 계속 누락하는 바람에 무공이 빛을 보지 못했다.

작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보훈병원을 그의 이름을 따서 '티보 루빈 메디컬센터'라고 개명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명명식은 지난 10일 병원주차장에서 엄숙하게 열렸다.

티보 루빈은 누구인가. 그는 젊은 시절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한국에서 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맥아더나 밴프리트 장군은 알지만 그들 밑에서 용감히 싸웠던 이름 없는 전투원은 모른다.

유대인 수용소를 나온 루빈은 1948년 뉴욕에 정착, 아버지한테서 배운대로 구두제조공으로 일했다. 1949년 군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영어실력 미달로 낙방, 재수 끝에 다음 해 턱걸이로 군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나자 1950년 7월 그의 부대는 한국에 파견됐고, 그는 제1기갑사단 8연대 1중대에 배치됐다. 그런데 그의 상사로, 유대인 혐오자인 아서 페이튼 하사는 위험하고 어려운 정찰 등의 임무를 주로 루빈에게 시켰다. 기록에는 ‘본인이 자원했다’고 거짓말로 기재했다. 그와 함께 싸웠던 전우 13명이 서한을 국방성에 보냄으로써 진실이 공개됐다. 루빈의 상관은 그가 전투 중 전사하기를 바랐다고 이들은 서한에서 밝혔다.

1950년 7월23일부터 53년 4월20일 사이 루빈의 소속 부대는 부산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그는 뒤에 혼자 남아서 중요한 대구-부산 도로를 지키도록 명령받았다. 곧 인민군 부대는 그가 지키는 고지를 공격했다. 그는 24시간 이들과 단독으로 싸우면서 적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다. 덕택에 인민군의 진격은 둔화됐고 제8기갑연대는 무사히 퇴각했다.

작전이 성공하면서 그의 연대는 인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루빈은 500600명의 적을 포로로 잡는데 결정적 무공을 세웠다.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북한의 운산에서 야밤에 대대적 인해전술 공격을 해왔다.

한국전3.jpg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 현장에서 미군이 박격포를 쏘고 있다.

 

그날 밤과 그 이튿날 부대를 지키는 기관총 사수 3명이 연달아 죽자 루빈은 30인치 기관총을 잡았다. 그는 탄환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쏘고 또 쏘았다. 이런 용감한 자세에 눌린 탓인지 적의 진격은 늦춰졌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루빈 상등병은 중상을 입고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중공군은 그를 고향 헝가리로 보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고 동료병사들과 함께 2년 반 동안 포로로 지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굶주림과 전염병, 추위 등에 노출되자 많은 군인이 자포자기가 됐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혼자였다”고 하사로 포로가 됐던 레오 코미어는 기술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자는 루빈이었다. 거의 매일 저녁 그는 수용소에서 몰래 빠져나가 중공군이나 인민군의 보급창에 잠입, 음식을 훔쳐왔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다. 잡히면 고문 아니면 총살을 당하는 위험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는 음식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뿐만 아니라 붕대를 감아주거나 옷을 입혀주는 등 늘 도움을 주었다. 거동이 불편한 부상병들을 화장실로 부축해 데려갔다. 그밖에도 많은 선행을 했는데 그것을 유대인 전통의 미츠바(mitzvahs·계율상의 선행)라고 신앙심이 깊은 루빈은 설명했다. 수용소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것이 그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캠프에 수용됐던 40명의 병사가 살아 돌아오는데 크게 공헌했다.

군대에서 전역한 그는 가든그로브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했다. 그러면서도 정기적으로 롱비치 군병원에서 봉사자로 일했다. 봉사시간 2만 시간을 넘어 표창을 받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경험과 한국전 참전은 피니간스 전투(Finnigan’s War)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기획 시리즈 한국전을 돌아본다(2)

기획 시리즈 한국전을 돌아본다(3)

기획 시리즈 한국전을 돌아본다(4)

기획 시리즈 한국전을 돌아본다(5)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