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진칼럼] 007 로저 무어

박흥진 LA한국일보 편집위원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12 Ju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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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무어

쉐이큰한 보드카 마티니와 여색을 즐기며 월터 PPK를 뽑아들고 악인들을 처치하는 불사신과도 같은 제임스 본드도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스크린에서 세 번째로 살인면허 더블O를 소지한 영국 첩보부 MI6의 스파이 본드로 나왔던 로저 무어가 최근 89세로 타계했다. 지금까지 본드로 나왔던 6명의 배우 중 제일 먼저 별세했다.

무어는 제1대와 제2대 본드역의 션 코너리와 조지 레이젠비에 이어 ‘리브 앤 렛 다이(1973)’에서 본드로 나온 이후 무려 12년간 총 7편의 007시리즈에 나왔다. 첫 영화에 이어 ‘맨 위드 더 골든 건’ ‘스파이 후 러브드 미’ ‘문레이커’ ‘포 유어 아이즈 온리’ ‘옥토푸시’ 및 ‘뷰 투 어 킬’ 등에 나온 뒤 지난 1985년 58세로 본드 역에서 퇴역했다. 본드 역을 가장 많이 한 배우다. 무어의 뒤를 이어 티모시 달턴과 피어스 브로스난을 거쳐 현재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다.

무어의 007시리즈 중 가장 훌륭한 것이 ‘스파이 후 러브드 미’다. 영화에서 본드 걸로는 바바라 박(비틀즈 멤버 링고 스타의 아내)이, 본드의 악인으로는 독일배우 쿠르트 유르겐스가 각기 나왔다. 유르겐스의 하수인으로 금속이빨로 사람을 물어 죽여 ‘조스’라 불리는 거인으로는 리처드 킬이 나왔다. 난 언젠가 런던을 방문했을 휠체어에 앉은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본드를 혼 내주던 그가 휠체어에 앉은 모습을 보면서 세월무상을 느꼈었다. 

역대 본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사납고 냉정하고 폭력적인 션 코너리다. 평소 농담 잘하던 무어도 “나를 빼곤 션이 가장 좋은 본드”라고 말했다. 코너리가 어둡고 거칠고 가차 없는 본드였다면 무어는 가볍고 코믹한 터치로 본드를 표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본드 영화도 시리즈 두번째인 ‘007/위기일발’이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 스파이였던 이안 플레밍이 쓴 본드 소설에서 그려진 본드는 무어보다는 코너리가 더 본드의 성질에 걸 맞는다. 현 본드인 크레이그는 코너리에 이어 이런 본드의 근성을 가장 잘 표현한 배우로 평가 받고 있다.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특징인 무어는 연기파가 못 된다. 그도 자신을 배우로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난 오래 전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그를 본적이 있는데 그저 평범한 시민처럼 보였다.

그런데 무어는 실제로는 용감무쌍한 본드와는 전연 다른 성질을 지녔었다고 한다. 그는 지나치게 병을 의식했고 고지공포증자요 총을 싫어했다는 것. 그리고 본드가 즐겨 마시던 보드카 마티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007시리즈 초대 제작자인 고 알버트 브로콜리는 첫 본드로 무어를 골랐었다. 그러나 그 때 무어가 영국의 인기 TV시리즈 ‘세인트’에 출연 중이어서 역을 맡지 못 했다. ‘세인트’에서 무어는 현대판 로빈 후드인 사이먼 템플라로 나오는데 이 시리즈는 1962년부터 무려 7년간 방영됐다. 

런던에서 태어난 무어는 엑스트라 노릇을 하면서 왕립 극예술 아카데미에서 수련했다. 이 때 동급생 중 하나가 총 14편의 본드영화에서 본드의 상관인 M의 여비서 모니페니로 나온 로이스 맥스웰이다. 모니페니는 본드를 연모하나 본드는 늘 이를 가볍게 넘겨버리곤 했다. 

‘세인트’의 인기로 무어는 MGM과 계약을 맺게 된다. 007 시리즈 외에 그의 영화들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온 신파극 ‘내가 마지막 본 파리’와 리처드 버튼이 주연한 액션 스릴러 ‘와일드 기스’ 및 버트 레널즈가 나온 코미디 액션 영화 ‘캐논볼 런’ 등이 있다.

무어는 생애 후반기에 자기 친구였던 오드리 헵번이 생전에 맡았던 UN 국제아동비상기금의 친선대사로 활약했는데 이 공로로 영국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서’로 불렸다. 

“마이 네임 이즈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본드는 수많은 여자와 정사를 즐기면서도 “아이 러브 유”라라는 말을 안 하는 철저한 플레이보이다. 그런 본드가 여인을 사랑해 결혼까지 한 영화가 ‘여왕폐하의 007’이다. 호주 배우 레이젠비의 유일한 본드 역으로 그는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트레이시(다이애나 릭)와 결혼하나 결혼식 후 둘이 함께 애스턴 마틴을 몰고 가다 본드의 천적인 암살집단 스펙터의 두목 언스트 블로펠드(텔리 사발라스)가 쏜 총에 맞아 트레이시가 숨진다. 

본드는 죽은 트레이시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데 영화에서 터프 가이 본드가 흘린 첫 눈물이다. 이 사건 이후로 본드는 다시는 절대로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이 있다. 

다음 007시리즈에는 크레이그가 그대로 나올 예정이다. 크레이그가 본드 역에서 은퇴하면 바톤을 이어 받을 배우들로 탐 하디와 마이클 화스벤더 및 이드리스 엘바 등이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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