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파이들(1) 모토지로 아카시 남작(하)

(Baron·1860∼1919)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koreatimes.net) --
  • 22 May 2019

조선 잠 잘 때  레닌 설득, 러시아 공산혁명 지원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배후조종  “일본군 10개 사단 공적에 해당” 찬사 받아  공작금 중 쓰고 남은 돈 고스란히 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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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잠잘 때 일본은 류큐열도, 대만을 꿀꺽 삼켰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사이베리아를 병합하는 꿈을 갖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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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대좌(대령)는 스위스 제네바의 레닌 별장에서 레닌과 회담한다. 아카시는 레닌의 공산주의 운동에 일본이 자금을 대겠다고 제의하자 레닌은 "일본이 왜 러시아 내정에 간섭해 운동을 지원하려 하는가"라고 반문한 뒤 조국을 배반하는 행위라면서 거절한다.

그러나 아카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타타르족의 피가 흐르는 당신이 타타르를 지배하는 러시아인의 수장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하는데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이 왜 배반인가?”라는 말로 레닌을 설득한다. 그는 레닌을 러시아로 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관여한다. 제정 러시아의 내무장관이 암살되고 전함 포템킨 반란사건이 발생한다. 레닌은 후에 “아카시 대좌에게 정말로 감사하다. 감사장이라도 주고 싶다”고 술회했다.

 

아카시는 러시아 내 반정부 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부어 러시아의 대일전쟁 수행능력을 좌절시켰다. 그것이 목표였다. 
그는 시바 료타로의 유명한 장편소설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 러일전쟁의 공로자로 묘사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적국인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해서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즉 지구상에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것을 도운 인물인 것이다. 
1864년 후쿠오카 번에서 사무라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유학을 거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필리핀 등에서 근무했다. 필리핀 근무 때 스페인과 전쟁을 치르는 미국이 필리핀 사람들을 설득해 스페인을 공격하도록 하는 첩보활동을 보고 정보와 스파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896년부터 참모본부 소속으로 청나라와 프랑스에 파견됐고 1902년부터는 제정 러시아의 일본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배속돼 1904년에 러일전쟁을 맞이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시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옮겨 러시아의 지배를 당한 동유럽제국에 부는 반 러시아 감정을 실감하고 노동자 같은 러시아 내 불만세력을 선동해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려는 생각을 했다. 핀란드나 폴란드의 독립 세력들과도 접촉했다. 

아카시-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서 암살당한 후의 아카시 모토지로와 주변 측근들.jpg

아카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작금이었다. 그는 본국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타로, 테라우치(한국주재 총독 역임) 등에게 부탁해 100만 엔의 자금을 요구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국가재정이 빠듯한 상황에서 야마가타는 지원을 결정한다. 일본 한 해 예산은 2억3천만 엔이므로 100만 엔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0억 엔 가까이 되는 거금이었다.
풍부한 공작금을 손에 넣은 아카시는 우선 73만 엔으로 레닌 혁명을 지원한다. 1차대전에서 러시아와 싸운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아카시 한 사람이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거뒀다"고 칭찬했다. 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육군 참모차장 나가오카 가이시(長岡 外史)는 "그의 첩보활동은 일본군 10개사단 공적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작금 가운데 남은 27만 엔을 고스란히 정부에 반환했다. 반납할 의무는 없었지만. 
아카시는 러일전쟁 후 귀국, 참모차장, 제6사단장, 육군대장, 대만 총독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차기 총리 물망에 오르다가 1919년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대만에서 고향 후쿠오카로 돌아가 요양 중 숨을 거두는데 유언에 따라 대만에 묻혔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유럽 외교가에서 활동했던 아카시는 러시아와 관련된 뛰어난 연구물도 남겼다. 이것은 1906년 총참모부에 아카시 복명서 (明石復命書)란 제목으로 보관됐으나 종전 무렵에 소실됐다. 지금은 그가 저술한 필사본 ‘낙화유수(落花流水らっかりゅうすい)’가 전해진다. 메이지시대 인물들은 회고록에 그럴듯한 제목을 붙이는 취미가 있었다. 이것은 총 8장으로 러시아 황제의 부패와 국민저항의 역사. 농노제, 농노 해방 후 국민들이 가진 불만,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의 원인과 학설,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플레하노프, 피의 일요일 유혈사태를 선동한 정교회 사제 가폰 등 러시아 내 주요인물의 분류와 소개, 핀란드 독립주의자 시리약스와 레닌 등 혁명가 소개, 러일전쟁 중 수행한 첩보활동과 관련한 여러 테마들을 포함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당시 쓰여진 러시아 역사 가운데 내용이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에 충성한 철저한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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