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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도 몰랐던 익명의 독지가
나의 의견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Jun 19 2019 06:45 PM
피터 신 / 포트워싱턴
일제 강점기 시절, 농촌에 소작농의 아들로 어려운 삶을 살던 청년이 있었다. 열아홉이 되던 해 다리가 골수염에 걸렸다. 어려운 처지, 그리고 시골에서 어찌 손 써볼 수도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중 기적 같은 기회를 얻어 수술을 받았고, 완치가 됐다.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은 겨우 겨우 차비를 마련하여 일본 오사카로 갔다. 거기에서 어떤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 공장 사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대신 그에게 공장을 유산으로 넘겨주었다.
그 공장은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원료로 전쟁 물자와 기타 광산기기를 생산하는 업체였다. 전쟁을 끼고 공장은 번창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독립군에게 돈을 댈 수가 없었기에 익명으로 조국에 돈을 보내 여러 학교를 지었다. 지금의 대천여고, 주산농고, 초등학교 등 그리고 지서와 소방서 등을 지어 낙후되고 소외된 자기의 고향을 배움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익명으로 돈을 보냈지만 그 돈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역에선 그분에게 감사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일본의 전운을 미리 짐작한 그 분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다음해 전쟁 종전되었다.
6.25가 발발하면서 그분은 피난을 갔고, 공덕비는 공산군으로부터 훼손을 피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묻었다. 휴전이 되고도 오랜 후에야 그 공덕비는 다시 세워졌다. 서울에서 오는 그분을 위하여 지역의 학생들이 기차역에서부터 비가 세워지는 학교까지 양 옆에 도열하여 환영하며 박수를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도 그 속에 끼어있었지만 그분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행사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야 그분이 나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그분은 자신이 한 일을 절대 나타내지 않았고, 알려지는 것을 금하였다.
그분은 가셨고, 지금은 고향에 공덕비만 조용히 서있다. 그분이 원치 않아 아무도 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유지만은 가슴에 담고 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물이란 어떻게 쓰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버님 성함은 신인철씨로 현재 공덕비가 충남 보령군 주산면 주산 초등학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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