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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 가장 잔인한 군대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02 Mar 2020 02:58 AM
인간이길 포기했던 엽기적 범죄들 “우리 민족이 최고… 나머지는 모두 야만” 중국인 1천 만 명 ~ 1천 5백만 명 살해
마닐라 대학살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연합군이 필리핀에 상륙 마닐라로 돌격했다. 이와부 치 산지(岩淵三次)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일 본의 육해군 혼성부대는 항복이나 퇴각을 거부하고 미군과 3주 이상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때 패전의 두려움에 휩싸인 일본 군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화 풀이를 했다. 당시 마닐라 시내에 있던 약 70 만 명의 시민들 중 대략 10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으며, 이는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에서도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대 규모의 인명피해였다.
이성을 잃은 일본군은 동맹국 독일의 민 간인들이 피난해 있던 유명한 사교 클럽인 져먼클럽(GERMAN CLUB)으로 쳐들어갔 다. 그들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아기 엄마를 칼로 찔러 죽이고 거기 있던 여인들을 무차 별적으로 성폭행했다. 20명이 넘는 일본군 들이 한 소녀를 윤간한 후 유방을 칼로 도려 낸 일도 있었다. 소녀가 사망하자 한 일본군 이 도려낸 유방을 자기 가슴에 대고 여자 흉내를 냈고 강간과 살인에 동참했던 다른 일본군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들은 소녀 와 또 다른 두 명의 희생자들의 몸에 가솔린을 붓고 불을 붙였다. 광기였다.
치치지마 식인사건
일본군이 포로의 인육을 먹은 사례는 너무 나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지금 일본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보급이 끊겨 굶주리던 일본군이 작업장에서 중노 동을 하던 미군, 필리핀 포로들 살해하고 잡아먹는 것은 그리 별난 일이 아니었다.
실제 뉴기니 전선에서 일본군 제18군 사령부는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라 는 지침을 내렸다. 일본군은 아군만 아니면 인육을 먹어도 된다고 공식적으로 허가했 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에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 의 치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은 달랐다.
섬 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 시오(立花芳夫)와 그 부하들은 잔치를 벌이 다가 술안주가 부족해지자 포로로 잡혀있던 미해군 조종사를 살해하고 요리해 서로 나눠먹었다. 그 이후 그들은 부대의 최고 지 휘관들의 지휘에 따라 직접 포로를 구타, 학 대, 고문하고 인육을 체계적으로 배급, 나눠 먹었다. 굶주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렇게 장 기적이고 공식적으로 인육을 먹은 것은 치 치지마의 일본군을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
일본군 성노예 사건
한국 등에서 잡혀온 위안부 여인들에게 일본군이 행한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태도 빼 놓을 수 없다. 이들은 군복 공장에 취업시켜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끌려온 소녀들이 었다. 이들은 전선으로 보내져 하루에 수십 명의 일본군들에게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자기네 종족이 세계 에서 가장 우수하고 다른 종족은 모두 야만 인이라는 환상을 주입하고 각인시켰다. 이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인들은 다른 나 라의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황국 을 위해 다른 민족을 물어뜯을 사냥개를 길 러내기 위해 이 같은 인종차별적 사고방식 이 정책적으로 조장됐다. 이 때문에 일본군 은 한국에서, 만주에서, 또는 중국본토, 필리 핀에서 그토록 비인간적인 잔인한 행위를 자 행하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난징 대학살 사건
중국 난징(남경) 대학살 사건에서 일본군은 중국인을 무려 35만 명이나 죽였다. 임신부 의 배를 창으로 찔러 태아를 꺼냈고 태아를 바비큐 한다고 불에 구웠다. 단순히 죽이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갖고 다 니는 긴 칼로 민간인의 머리를 잘라 장난감 처럼 가지고 놀았다. 일본군들은 공포에 떠 는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살육하면서 쾌감 을 느꼈다.
중국의 쉰들러(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라고 칭송받는 전직 나치 출신 독일 외교관 욘 라베John Rabe(라베는 나치 당원이었지 만 난징 대학살 당시 동맹국이었던 일본군 의 만행에 맞서 난징에 안전지대를 만들어 약 15~25만 명의 인명을 지켜낸 것으로 유 명)에 의하면 한 고장에서는 중국 여성 1천 명이 강간 살인 당했다.
근처 작은 연못에서 는 시체 30구가 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 은 두 팔이 등 뒤로 묶였고 일부는 큰 돌멩 이가 목에 묶여 있었다. 시체가 물속으로 가 라앉도록 매달아 놨던 것이다. 강 옆에는 큰 창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창고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불타 죽어갔다(한국 경기도 재암리 교회 사 건과 같은 식).
만주 731부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당 시 일본군이 사용한 살인 방법은 1백 가지 종류가 넘는다. 일본군들은 온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살인 방법을 수집해 직접 감행하 고 실험한 듯하다. 만주 주둔 육군 731부대는 한국인, 중국 인 인체로 갖가지 생체 실험을 했다. 잡혀온 주민이나 포로의 몸에 일부러 균을 넣어 그 들이 어떻게 죽는지를 관찰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마을에 박테리아를 고의적으로 퍼뜨려 전염병이 돌게 하면서 생체 무기를 개발, 연구했다. 이 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다 급히 많은 증거를 없앴다.
그러나 그들의 모 든 만행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터넷의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차전 기 간 일본군이 죽인 중국인을 1천5백만에서 2천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중국인들은 이보 다 훨씬 많은 3천5백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 일 본의 정부도, 언론도, 시민도 이 끔찍한 역사 적 범죄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돌이키 기 고통스러운 역사를 우리가 거듭 되뇌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