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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작은 섬 펠렐리우(Peleliu)
“세계서 가장 잔악한 군대 : 일본군들“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26 Mar 2020 11:37 PM
점령하라 vs 사수하라
▲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초토화된 펠렐리우섬.우거졌던 정글속이 보인다
시뻘건 주홍빛 화염이 다시 동굴 속을 핥자 피골이 상접한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바우슬의 손가락이 더 빨랐다.
그는 삐쩍 마른 일본군을 즉결 처리했다. 산 채로 불에 타서 숯이 되느니 라이플 총알을 맞더라도 화약 내와 매연이 섞인 굴 안에서 숨쉬기가 곤란했던 모양이다. 살기 위한 본능적 행동이 아니었을까.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또 한 명이 튀어 올라오면서 수류탄 핀을 뽑았다. 바우슬은 순간적으로 총신을 들어 올렸으나 수류탄은 이미 미군 쪽으로 날았다. 바우슬은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다만 전우들이 또 한 번의 대량살상당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몸을 수류탄 위로 던졌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그의 팔과 다리가 1개씩 공중으로 날아갔다. 피가 주위를 흥건하게 적셨다. 다행히 대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저 일본 놈을 죽여.” 바우 슬이 소리쳤다. 어쩐 일인지 그는 아직 생명이 있었다. 화염방사기팀은 악이 뻗친 듯 그 일본군을 새까맣게 숯으로 만들었다. 처참한 죽고 죽이기, 그렇다고 누구도 이득은 없었다.
펠렐리우에 상륙한 지 2시간도 안됐는데 그동안 바우슬은 팔다리를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다에 정박 중인 의료선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의료진은 그의 출혈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군 수류탄 파편은 그의 내장 깊숙이 박혔다. 3일 후, 44년 9월 18일, 용감했던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태평양전쟁 상황은 유럽전선 병사들과는 최후가 달랐다. 유럽의 전사자는 땅 속에 묻고 십자형 나무 조각이나 어떤 표적을 만들어 놓아서 후에 가족들이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해병은 달랐다.
바우슬의 몸은 헝겊으로 똘똘 말고 무거운 포탄 탄피(껍질)와 함께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깜깜한 바다 밑이 무덤이었고 지상에는 형체도, 표적도 남지 않았다.
그는 펠렐리우 전투에서 미군 최고훈장,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은 미군 제1호가 됐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수훈자는 아니었다.
제2장
“나는 돌아 왔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우리는 돌아왔다. 믿거나 말거나”라면서 참모장에게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해병대원들이 5주째 전투 중인 펠렐리우에서 7백 마일 떨어진 곳, 필리핀 비자야 군도 레이테(Leyte) 섬에서 64세의 미군 태평양 총사령관은 미군 함정 내슈빌 난간에 기대어 섰다. 멀리 떨어진 사랑하는 필리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서는 4시간 전 그의 휘하 장병 10만 명이 상륙했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유럽전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바로 지난 6월 디 디데이(D-Day)라 불리는 프랑스 노만디 상륙작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자존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맥아더가 아이젠하워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는 레이테 섬 공격을 A-Day라 불렀다. 어테크 데이(Attack Day: 공격의 날)라는 뜻이었다.
펠렐리우 상륙에 대해 군정보국은 ‘저항은 최저 수준에 불과할 것이므로 걱정할 것 없다’라고 보고했다. 대단한 실수였다. 일본군의 정신무장과 충성심을 얕잡아 본 것이다. 그들은 필리핀에서도 맹렬하게 저항했다. 맥아더는 해안에서 수 마일밖에 있었지만 야자수 숲에서 나오는 기관총과 자동소총 사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글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머리 위 꼭대기에는 미군 전폭기들이 깊숙이 숨은 적들을 찾아서 편대를 지어 날았다. 일본의 우수한 0식 함상전투기 (零式艦上戦闘 機), 제로센(레이센, 零)의 공격을 경계하면서.
2년 전 맥아더는 필리핀을 일본군에게 내준 후 “반드시 다시 와서 탈환하겠다”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일본의 필리핀 함락은 그의 생애 최대의 치욕이었다. 오늘은 바로 그 선언과 약속을 이루는 날이었으니 그의 마음에 감회가 깊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전세계 뉴스를 장식했다.
자기를 지칭할 때 ‘나’, 또는 ‘본인’, 본관’이라고 하지 않고 “맥아더”라고 3인칭을 쓰는 그는 6척 신장으로 아버지로 인해 필리핀과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 아더 맥아더 주니어는 10대 소년 때 미국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고 미국-스페인 전쟁 후에는 필리핀의 군사 행정관을 지냈다.
아들 더글라스는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이때까지 1903년 임관 때와 같은 뱃살 없는 몸매를 유지했다.
그는 순양함 내슈빌에서 내려와 상륙정에 옮겨 탔다. 평상시처럼 잘 다려진 카키색 유니폼을 입었고 가슴이나 어깨에는 언제나처럼 계급이나 훈장을 달지 않았다. 옷을 자주 갈아입으면서 팔소매와 바지 주름을 꽤 까다롭게 유지했다.
지금, 그는 상륙을 기념하려는지 군복을 새로 갈아입었다. 상륙 순간 일이 틀어지고 포로로 잡힐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 장전된 데린저(derringer)를 뒷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구경은 크고 총신은 짧은 권총이었다.
금박이 박힌 색 바랜 육군 원수의 모자를 땀방울이 적셨다. 라이방(Ray-Ban (레이밴), 브랜드 이름) 선글라스가 그의 갈색 눈을 바닷물이 반사하는 강한 햇살로부터 보호했다. 또 한 가지, 그의 패션을 완성,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옥수수 이삭(Corncob) 담뱃대다. 언제나 불 없이 어금니 쪽에 물고만 있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그의 브랜드를 완성하는 마지막 아이템이었다.
참모장 리처드 서더랜드 중장이 그를 따라 사다리를 내려왔다. 바탄 갱 Bataan Gang이라고 부르는 나머지 간부들도 함께 상륙정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전쟁 특파원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그가 직접 선택한 기자들이었다. 그는 홍보의 중요성을 아는 장군이었다.
맥아더가 상륙하는 장면이 전 세계의 신문 1면 톱뉴스로 보도되도록 그의 상륙은 세심하게 계획됐다. 계획은 그가 모래사장이 아니라 작은 선창(dock)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진기자들이 먼저 카메라를 준비, 완벽하게 풀을 먹이고 잘 다려진 유니폼을 입은 장군이 다시 한번 필리핀 땅에 발을 내딛는 역사적 광경을 렌즈에 담았다.
필리핀에서 후퇴한 지 거의 1천 일만에 그는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