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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마틴 스펜서
Lilly Martin Spencer: 1822 - 1902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Nov 06 2020 01:54 PM
19세기 가장 인기있고 복사본이 많이 만들어졌던 화가 가정사, 여인과 아이들의 행복한 장면을 많이 그렸다.
▲ 자화상. 1841. 19세때
릴리 마틴 스펜서는 프랑스계 영국인으로 8세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17-8세에 이미 많은 그림을 그려 마을에서 소문도 나고 작은 전시회도 가졌다. 19세에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롱워쓰라는 후견인이 학비를 도와주며 실력을 더 키울 때까지 전시를 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 제의를 거절하고 신시나티의 가을전시회에 참가했다. 이후 거기서 7년동안 공부하며 화가로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보냈다. 롱워쓰가 다시 유럽유학을 보내주겠다 했으나 릴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화가들은 상류층의 취미같은 존재였기에 릴리가 직업화가였던 것은 특이한 예이다.
▲ 우리 둘 다 시들겠지. 1869
신시나티에서 만난 릴리의 남편은 재봉사였는데, 남편이 집안살림을 전담하고 릴리가 가장이 되었다. 그들의 가정은 행복했고 13남매를 두었다. 주변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직업화가를 포기하지 않았다.
1848년 릴리와 가족이 뉴욕으로 이사했을 당시는 중산층들이 그림구매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릴리의 행복하고 재치있는 가정을 주제로 한 그림은 인기가 있었다. 미술비평가들은 “그녀의 그림은 긍정적인 생활을 잘 표현하여 마치 17세기 쟝르화처럼 열망과 행복감을 불러왔고, 또한 그림의 주인공들이 관람자를 직시한다거나 순진한 교태, 위트가 담긴 묘사로 인해 그의 작품은 더 인기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릴리의 경제 사정은 힘들었다. 석판화도 발행하고 삽화도 그렸으나 생활이 어려워 나중에는 닭도 기르고 야채도 재배해 자급자족했다. 후에는 주로 가정을 주제로 삼았던 것에서 벗어나 여인들 머리 모양, 의상 묘사에 더 심혈을 기울였고 여성의 관능성을 강조하는 식(유럽의 영향)으로 화풍을 바꾸었다. 그러나 1860년대의 남북전쟁은 예술가들의 관점을 바꾸었고, 릴리도 “가정에서의 전쟁 혼(1866 아래)”같은 그림을 그렸다.
1880대에도 릴리는 활발히 자신의 그림을 대중에 알리려 했으나, 이때는 미술애호가들이 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소장하려 하여 별로 성과는 없었다. 1902년 사망할 때까지 릴리 마틴 스펜서는 남성위주의 힘든 여건에서 60여년을 전업화가로 활동했다.
▲ 가정에서의 전쟁 열기. 빅스버그 전쟁을 축하하며. 1866
▲ 내게 키스해봐, 당밀과 키스하는 맛을 보게될테니.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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