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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시민들 야간공습에 만성
“또 왔구나, 잠이나 더 자자”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Dec 06 2020 04:13 PM
뭔가 큰게 오려는지 며칠간 폭격없어 알 수 없는 불쾌감 조선소 출근하던 학생은 다음날 가족들과 피난대열
일본 히로시마
1945년 8월5일 밤 11시
▲ B-29 에노라 게이에서 투하되어 폭발한 원자폭탄 -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일요일밤, 모두가 잠을 잘 시간이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월요일이면 또 열심히 일을 해야 하므로 지금은 잘 쉬어야했다. 우지나 지역의 소방관 요사쿠 미카미(35)는 12시간 여를 근무했으므로 24시간 근무중 절반은 넘겼다. 별일 없으면 지금부터 침대에 들어갔다가 아침 8시에 근무를 교대하면 끝이다. 그러면 미카미는 전차를 타고 변두리 사케마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근무자들이 출근하느라고 법석대는 반대방향으로 가니 마음이 평안해서 졸기도 한다.
아침이면 미카미는 아침밥 냄새를 맡으며 집에 들어선다. 석탄을 지피는 히바치난로 위에서 보글보글 음식이 끓는다. 아내는 아이 둘이 학교 갈 준비를 할 때 들어서는 남편을 따듯하고 예의있게 맞는다.
그러나 45년 8월6일엔 이런 생활도 마감했을 것이다.
시민들은 ‘부키미’라는 말을 자주 썼다. 미군들이 최근 며칠 간 폭격을 안해 도시가 조용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고 그래서 불안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가 운이 다해서 조만간 어떻게 될 것이라는 조크도 했다. 소름끼쳤다. 소방관으로서 미카미는 목조주택이나 빌딩들이 파괴된 곳에 남아 딩구는 나무나 종이같은 것들이 모두 수거된 것을 보고 안심했다. 도쿄에서는 작년 3월 화염폭탄 공격을 받았을 때 집과 집 사이에 이런 물질들이 많아서 불길이 더 빨리, 더 멀리 퍼졌다. 이것은 특히 소방관에겐 교훈이었다.
▲ 원자폭탄이 폭발한 다음날 초토화된 히로시마 시의 모습 - 1945년 8월 7일
그는 이날 아침 서글프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했다. 시 당국은 폭탄세례에 대비해서 여자와 아이들을 멀리 피난시켰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이날 아침 집을 떠났다. 수천 명이 도시 밖 외곽지역으로 나갔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마음이 놓였다. 친척들이 없는 가족은 절이나 공회당, 학교 같은 곳에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지내므로 가족들도 함께 할 것이다.
내일 아침이 되면 그는 가족들이 생각날 것이다. 아침에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무도 반겨주는 아이들이나 아침을 해놓고 기다리는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공습사이렌이 불었다. 작은 창고 옆 손바닥만한 자리에서 자던 16살 아키라 오노기가 눈을 떴다. 공습경보가 밤에 울리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었다. 미군비행기들은 목적지에 가느라고 히로시마를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키라는 방공호로 뛰어가지 않았다. 1937년 영공방어법은 이런 날을 위해서 제정됐지만 전쟁이 오래 계속되고 미군폭격기들이 히로시마는 봐주는 것 같아서 시민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두번 째 경보가 울리면 모든 비행기가 돌아가서 이젠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영공법은 B-29편대의 요란한 엔진소리가 나면 남여노소 모두 방공호로 빨리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진짜 공습인가. 걱정도 있었지만 아키라와 4명의 가족은 침대에서 좀 더 자고 싶었다.
이날밤 B-29기 588대가 전국 5개 목표를 폭격했다. 역시 히로시마는 제외됐다. 수 많은 비행기가 하늘을 덮어서 햇빛을 가려도 방공포에 맞거나 일본군 전투기와 공중전, 추락하는 미군기는 1대도 없었다. 완전한 제공권을 가진 미군은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때릴 수 있었다.
곧 폭격이 끝났다. 아키라는 몸을 돌려 다시 잠들었다. 고교 2학년이며 우등생인 그는 이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국토 방위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미쓰비시조선소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국심에서 하는 일이지 결코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다.
앞이 전혀 안보이는 깜깜한 밤이지만 기온은 따듯했다. 아키라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부모가 약하게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뿐이었다. 내일 아침은 일을 가는 대신 일종의 항의로 결근하고 집에서 책이나 읽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20살 아키코 타카쿠라는 월요일이면 일찍 일어난다. 장래 유치원 선생이 되겠다고 꿈꾸지만 현재는 은행에서 일한다. 아침으로 옥수수와 두부, 밥을 먹고 전차를 타고 하초보리까지 갔다가 걸어서 게이비은행으로 간다. 한참 러시아워로 붐빌 때여서 전차는 늘 만원이다. 그렇지만 오타 강을 내려다보면서 일본군들의 사열장면을 보고 16세기에 지은 히로시마 캐슬(성)을 지나는 길은 기분이 상쾌하다. 모든게 순조로우면 아키코는 9개의 돌계단을 사뿐히 올라 이중문을 열고 3층 은행으로 들어간다. 그때가 딱 8시15분이다.
석조로 된 은행건물은 1층과 2층은 무장강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쇠막대, 두꺼운 철판 등으로 철저하게 막았다. 여직원들은 남자들 보다 30분 먼저 와서 사무실을 청소한다. 아키코는 은행 안에 들어서자 마자 출근도장을 찍고 창구유리창부터 책상 먼지를 털고 깨끗이 정돈한다. 다음엔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모범사원이었다. 윗사람들은 그가 일찍 출근하는 것을 고마워했다.
3주전 뉴멕시코 사막에서 원자탄(‘트리니티’) 폭발실험을 한 후 맨하튼프로젝트의 개발계획 담당 영국물리학자 윌리엄 페니는 폭발의 강도를 측정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이런 폭발이 일어나면 30-40만명 인구를 가진 도시를 완전파괴, 남아날 것이 없을 것이다.’
실험한 원자탄은 다이나마이트 1만 톤의 파괴력을 가졌다. 처음엔 눈이 부시게 밝은 불덩이, 다음엔 자주색 구름이 형성되었다가 밝아지면서 방사선이 성층권(지상 10-50 Km사이)으로 치솟는다. 이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은 수증기처럼 기화(氣化)해 버린다.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면1초의 몇 분의 1초 만에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골수(bone marrow)가 끓고 살은 뼈로부터 글자 그대로 폭발해서 떨어져 나온다. 다음 순간 사람은 압축가스로만 남았다가 자주색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하늘로 치솟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트리니티실험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전쟁의 새 양상이 세계 역사에 등장하도록 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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