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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 비밀은 60년만에 비로소 공개됐다
"나는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 05 Jan 2021 04:39 PM
출격차 이륙 순간 일왕의 항복방송으로 목숨 건져
【뉴욕타임스】 그의 비밀은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개됐다.
17살 때 가미카제(신풍·神風) 조종사가 된 그는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있는가. 태평양전쟁(2차대전) 말기 패배가 분명한 전세전환을 위해서 일본군은 수천 명의 청소년들을 동원, 국가와 일왕을 위해서 몸바치도록 훈련했다. 카즈오 오다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일본 항복후 고국에 돌아와 가정을 이뤘고 그후 순경이 되기 위해서 시험준비할 때도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인에게도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부인은 그가 해군조종사였던 것으로 알았다. 그 이유는 가미카제를 불필요한 자살행위라고 보는 사회여론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이 지나쳐 정신나간 사람들 소행이며 대원들은 모두 자원한 줄로 알았다. 사실은 그길로 유도됐는데.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이 변하자 오다치는 가까운 친구들과 참전 경험을 조금씩 공유했다. 2016년에는 회고록도 간행했다. 거기에서 그는 “매일 밤 내일이면 내 차례가 와서 난 별로 필요도 없는 목적을 위해서 죽겠지 하면서 잠이 들곤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책은 1945년 종전 75주년을 기념해서 작년에 나왔고 지난 9월 영문번역판이 발행됐다.
이제는 93세가 되자 과거를 털어서 역사로 삼기 위해서 그는 비밀을 책으로 공개한 것이다. ‘절대로 살아남으면 안되는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책을 통해 ‘특공대원은 용기와 애국심을 이용당한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려 했다. 그것은 무모한 만용이라든가, 지나친 애국심의 발로는 아니었음을 알리고자 했다.
“난 오늘날의 아름다운 일본이 있는 것은 특공대원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국민들은 잊지않기를 바란다.” 특공대원을 전부 싸잡아 불필요했던 우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 자기 집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가미카제는 일본 전쟁노력의 가장 확실한 상징이었고 열렬한 민족주의와 무력숭상의 망상이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그러나 전쟁 세대가 자꾸 사라지자 일본의 대립적인 정계는 아직도 카미가제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파에게 가미카제는 전통적 가치의 심볼이며 자기희생 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런 정신이 사라져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좌파들은 가미카제란 일본의 군사주의로 희생된 자들이며 그래서 전후 평화유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가미카제 특공대가 공중에서, 또 바다에서 적함에 돌진하면서 자폭해서 죽었다. 물론 공격받은 미해군 함정도 침몰되거나 큰 상처를 입었다. 어떤 특공자는 미함정의 굴뚝 속으로 들어가 엔진룸을 깨고 자기도 죽었다. 또 일부는 일본해군함정이나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부착되어 어뢰와 함께 발사된다. 대원은 어뢰를 조종하면서 적군 함정으로 돌진, 자폭한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자살특공대는 아마도 일본 가미카제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게 전쟁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며 좌파는 묻는다. 어째든 패전하지 않았느냐는 것.
오다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양쪽 주장에 대해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전할 뿐이다. 도쿄 외곽에 있는 그의 집에는 전쟁상황이 다소 어설프게 묘사됐다. 비행기도 그려놓았고 조종간을 힘을 주어 잡아당기는 모습도 재현해 놓았다.
그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진 입대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죽기를 각오했다. 그러나 생명을 함부로 내주고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강력한 반전자가 됐고 일본의 평화헌법이 지금 그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나라의 방어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그는 입대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Shrine)를 일년에 대여섯번 방문한다. 이 사원에는 일본의 악명높은 전범들과 전몰병사들이 함께 묻혔다.
비행장 근처에서 자라면서 비행기에 마음이 꽂혔고 전쟁이 시작되자 언젠가 조종사로 참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943년 육군에 입대해서 조종사로 훈련받은 정예의 소년조종사단 ‘요카렌’의 멤버가 됐다. 보통 가미카제는 학교교실에서 바로 불려와 훈련도 없이 싸우다가 죽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요카렌은 달랐다.
요카렌은 적기와 공중전을 하다가 죽도록 훈련받았다. 일본이 자살특공대를 적극 활용하기 전이었다.
44년 8월 일본이 점령한 대만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막바지 단계에 있었다.
미국의 우수한 기술과 비행기나 함정같은 전쟁무기들을 양산하는 산업능력에 눌려 일본군은 힘을 쓰지 못할 때였다. 연합군의 승리가 점점 눈에 보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대응전략은 더 많은 인간희생을 요구했다.
“공중전이 벌어지면 적기로 돌진, 프로펠러로 적기를 부셔라”고 배웠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면 너희도 분명 죽는다. 그래도 적기와 함께 죽으니 목적달성이 아닌가.”
이 전략은 일본조종사들이 목숨을 내놓으려는 각오가 적군 조종사들보다 크다는 가정에 근거했다.
44년 10월 필리핀 주둔 해군은 미군의 필리핀 공격(레이테만 전투 The Battle of Leyte Gulf)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기로 결정했다. 교관들은 특공대원들에게 자살전략을 설명하고 자원자를 찾았다. 아무도 자원하지 않은 채 침묵만 흘렀다. 당황한 장교들이 장황하게 연설하면서 다시 설득하자 몇 대원이 손을 들었다. “그때 우린 모두 집단자살하도록 다시 교사받은 것”이라고 오다치는 기록했다.
10월25일 필리핀에서 미군폭격에 부서진 활주로를 억지로 떠나는 특공대 편대를 보았다. 그러나 오다치가 속한 그룹은 미군폭격기들이 남아있던 일본 공군기를 파괴해버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섬에 남아있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전투에 동원할 비행기가 없었다.
수개월 후, 45년 4월4일 그들은 미군의 눈을 피해 대만으로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드디어 특공대원 생활 10개월 만에 첫 번째 출격팀에 포함됐다.
오다치의 제로(zero)전투기 - 전쟁 초기 태평양 하늘을 주름잡던 일본 비행기-는 1,110파운드의 폭탄을 실었다. ‘만탕크’로 실었으니 기체가 너무 무거워 비행기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억지로 이륙했는데 마침 운나쁘게도 미군비행기들이 그를 발견, 쫓아오려고 기수를 돌렸다. '이크, 큰일 났다.' 오다치는 폭탄을 재빨리 바다에 쏟아버리고 도망쳐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두 번째 출격했을 때 그의 편대는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해 기지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 6차례의 출격도 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실패했다.
출격과 출격 사이에는 수주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매일 밤 장교들은 다음날 아침엔 누가 출격하는지를 통보했다. “마치 사형집행 통고같아서 속이 뒤집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죽고 사는데 무관심하게 됐고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빨리 끝장나기를 원했다. ”
그러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마지막 출격을 위해 그의 비행기가 이륙자세를 취했는데 지상요원이 활주로로 뛰어오면서 “편대는 이륙을 중단하라”고 소리쳤다. 일왕이 방금 항복을 선언, 전쟁이 끝났으므로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가 가진 전쟁기념물은 사진 몇 장과 대만에서 만난 여인이 준 작은 선물 뿐이었다. 오다치는 여인의 정체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오래 간직한 몇가지 전쟁비밀 중 하나였다. [뉴욕타임스 노리코 하야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