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핫뉴스
"이름 석자로 충분"
호·명예박사 거부한 박정희 면모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 12 Jan 2021 04:27 PM
44년 전 북한에 식량지원 제안도
1977년 1월12일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남북 상호불가침 협정 체결에 동의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까지 제안했다.
44년 전 박정희가 북한의 김일성에게 이 같은 파격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독재를 펼쳐 비난을 받았지만 겸손하고 청빈한 면이 있었기에 지금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의 개인적 면모를 보여주는 글 가운데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관심을 끈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박정희란 이름 석자로 족하다"
호(號)도, 명예박사도 거부했던 그는 권력을 빙자한 군림(君臨)을 증오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씨에 따르면 박정희에겐 호가 없었다.
고령 박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박정희란 이름 석자로 충분하다"고 김성진 대변인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호를 쓴 적이 없다.
보좌관이 어느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까 그는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그는 사신(私信·개인편지)을 쓸 때는 절대로 '대통령 박정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 배(拜)'라고만 했다.
그는 생일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힌대로 알려져 한동안 생일이 아닌 날에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오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이를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무관심한 그는 권위적인 것들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그는 허례허식도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였다.
항상 청빈한 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그는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닳아빠진 혁대를 두르고 있어서 시신을 처음 검사한 군의관은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체 댓글
kimberley ( qhyu**@hotmail.com )
Jan, 14, 05:49 PM북한 김정일 조폭 에게 국민 세금 2,000만 딸라 을 바치고, 거짓과 조작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과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