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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 캐봇 페리
Lilla Cabot Perry (1848-1933)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14 Jan 2021 09:24 PM
19세기 보스턴 미술계의 주역 늦깍이 만학도, 일본 전통미술 습득으로 동/서양미술을 혼합
▲ 릴라 C. 페리의 자화상/1913년 작
릴라 페리는 1848년 보스턴의 명망있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외과의사였고 어머니 역시 지역사회 인사였다.
릴라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부모는 열렬한 노예해방론자였기에 전쟁기간 중 많은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가족은 캔턴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의 자연풍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열아홉이 되던 해에는 부모를 따라 유럽여행까지 다녀오게 된다.
26세가 되던 1874년, 페리는 언어학자인 토마스 페리와 결혼한다. 두 사람은 하버드 동창이었다. 토마스 페리의 할아버지 형제 중 한 명이 미 해군의 페리 제독이었고 그는 일본을 개항시킨 사람이었다. 릴라와 일본의 연결고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눈 내리는 월요일 / 1926 / 63.5cm x 71.1cm / oil on canvas
▲ 벚나무 / 1911 / oil on canvas / 80.7cm x 64.8cm
그는 스케치 기법 정도의 미술교육만 받았는데, 1877년부터 그의 초기작품이 등장한다. 어린이가 그의 작품에 평생 주제가 된다.
1884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하고 온 알프레드 콜린스로부터 36세의 나이에 정식미술 수업을 받게 된다. 다음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미술공부를 할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되었다. 페리는 1887년에 파리로 건너간다. 파리에서는 개인교습소에서 그림을 배우는 한편 대가들의 작품들도 공부를 하게 된다.
파리 체류동안 뮌헨을 방문해서 사회주의풍 사실주의를 배웠고 파리에서 활동하던 메리 카사트, 피사로, 모네와도 친분을 맺게 된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공부의 양과 폭이 엄청났다. 특히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 근처에 거처를 얻어 1909년까지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 부활절 아침/ 1915 /Oil on canvas / 116.8 x 82.2 cm
▲ 지베르니의 건초더미 Haystacks, Giverny / 1896 / 64.1cm x 81.3cm / oil on canvas
1891년 보스턴으로 귀국한 페리는 유럽의 인상파 기법을 소개하고 동시에 그림에 새로운 진실을 더한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주위에 펼쳤다. 그는 곧 보스턴 미술계의 주역이 되었고,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에 메사추세츠주 대표로 참석한다. 이런 그의 활동으로 1894년부터 그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897년, 남편이 일본 게이오 대학의 영어 교수로 임용되자 페리는 남편과 함께 3년간 일본에서 체류하면서 일본 전통미술을 공부하게 되고 마침내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을 혼합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1901년 미국으로 돌아온 페리는 파리 살롱전에도 꾸준하게 출품했다. 1905년, 파리로 건너 간 그녀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잦은 여행과 투자손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거의 다 쓰게 되면서 건강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가족의 생활비를 위해 초상화를 끝없이 그렸다. 풍경화보다는 초상화가 돈이 되었다.
1908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 온 페리는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당시 미국화단에 소개되는 아방가르드 미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유지했다. 1922년 뉴욕에서 페리의 첫 개인전이 열렸는데 그때 나이가 74세였다. 당시 신문은 ‘금년 뉴욕에서 개최된 여류화가전시회 중 가장 흥미로운 전시회였다’는 기사를 냈다.
1928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5년 뒤 페리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미국 인상주의 화풍으로 풍경화와 초상화에 능했고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고자 했다.
▲ 일본식 정원에서 In a Japanese Garden / 1898~1901 / 78.7cm x 63.5cm / oil on canvas
정리/주간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