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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상품 아이디어(13) 한국화장품 – 단학 포마드
가족 먹여살리는 가장家長 남성들의 필수물 되다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 18 Feb 2021 03:30 PM
머리를 단정히 한 신사복 차림이 유행 여성화장품은 생활수준 오른 후 등장
‘화장품’ 하면 ‘여성용’이라고 인식하지만 의외로 국내 굴지 화장품 회사들의 초창기 주력상품은 남성용 포마드였다. 1945년 창업 이래 줄곧 선두주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평양화학(창업주 서성환)은 메로디, ABC, 오스카 상표의 포마드로 기반을 닦았다. 쥬리아화장품의 전신 성미화학(창업주 정만원)도 1954년 크라운과 에이완 상표의 포마드로 첫 출발, 1960년대 초반에 업계 2위로 올라섰다. 남성용 포마드가 주력 상품이 된 것은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6.25 전후의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일부 부유층과 일부 연예인 등 특수 직종 종사자를 제외한 일반 여성들이 미용에 관심을 갖기에는 생활이 너무 빈한했다. 반면 사회활동을 하는 남성들 사이에서는 미군의 영향으로 머리에 기름을 발라 빗어넘기는 게 대유행이 돼 포마드의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물론 여성용 화장품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6.25 직후만 해도 가내 수공업 수준의 군소화장품 업체가 1백 개가 넘었는데 이런 곳에서 조악하게 만든 영양크림이 ‘동구리무’라는 이름으로 서민 여성층의 사랑을 받았다. 아이스크림통 같은 커다란 동이에 크림을 담아 손수레에 실은 크림 장수가 북을 ‘동동동’치면서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여자들이 헌 옷이나 잡곡 따위를 갖고 나와 크림 한 주걱과 바꿔가곤 했다. 물론 여유 있는 층에서는 태평양화학이나 럭키화학(창업주 구인회) 등에서 제대로 만든 크림을 사가기도 하고 미군 PX에서 불법유출된 외제품을 쓰기도 했다.
신사의 머리 손질 기름은 필수
여성소비자의 구매력은 남성에 비해 작았다. 한국화장품이 ‘단학’이라는 상표로 포마드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같은 포마드의 수요가 경제개발 열기와 함께 더욱 증폭되던 1962년 무렵이었다. 한국화장품 회장 임광정씨는 개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일본을 오가며 무늬목 장사를 해 돈을 모은 뒤 해방 후에는 개성에서 동화방직이라는 직조공장을 경영했다. 그가 탄탄했던 사업기반과 아내와 차남을 개성에 남겨둔 채 장남 충헌만 데리고 월남한 것은 1.4후퇴 때다. 부산에서 호구책을 찾던 그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담배와 밀수 약품을 국제시장에서 팔아서 다시 돈을 모은 뒤 한일약품을 동업으로 차리게 됐다.
그러나 5.16 직후 군사정부의 부정외래품 단속으로 화장품업 쪽에 발전 가능성이 보이자 일본의 쥬쥬 및 단쪼 화장품과 기술제휴 계약을 맺은 뒤 한국화장품을 창립했다. 이 때의 첫 생산품 5종 가운데 하나가 일본 단쪼의 기술로 만든 단학 포마드였다. 임씨가 사업가로서의 명운을 걸고 만들어낸 이 제품은 앞서 지적한 대로 경제개발 시대의 활기찬 사회 분위기에 편승, 한시대를 풍미하는 대히트 상품이 됐다. 사회활동을 하는 남성들은 정장을 하면 반드시 포마드를 바르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이 때문에 사무직, 관리직 종사자들은 매일 포마드를 사용했고 촌로들도 정장을 할 때는 꼭 포마드를 발랐다.
이발소에서는 요즘 고급 술집에서 손님이 마시고 남긴 양주에 이름을 써붙여 보관하는 것처럼 단골이 맡기고 간 포마드가 선반에 즐비하게 진열됐다.
단학 전의 포마드 시장은 태평양화학의 ABC와 오스카가 지배하고 있었고 하층에는 군소업체의 조악한 제품들, 상층에는 미군부대서 유출된 외제품이 자리잡고 있었다. 단학은 부정외제품 추방운동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미군부대 유출품들을 대체하면서 고급제품의 이미지를 쌓아나갔다.
이발소에 무료 배포 광고전략 적중
이것은 광물성 기름을 주원료로 했던 기존 포마드에 비해 수입 피마자 기름을 원료로 한 단학의 품질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화장품 김주동 전무는 “기존 제품은 냄새가 역하고 한번 바르면 빨래비누로 서너 번씩 감아야 겨우 기름기가 빠졌다. 단학은 순식물성이어서 비누질 한번으로 쉽게 기름기가 빠지고 향도 좋았다”고 회고했다. 또 기존 제품보다 훨씬 부드럽고 쉽게 굳어지지 않아 머리 모양을 만드는 것도 손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나선 판매전략이 주효했다. 한국화장품은 유명 학자, 공무원, 연예인 등 영향력 있는 1백여 명의 인사에게 제품을 선물, “품질이 외제에 비해서도 손색없다”는 소감을 받아 낸 뒤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 자전거 부대를 동원, 이발소마다 돌아다니며 제품을 무료 배포해 이름을 알리는 데 힘썼다. 이 같은 작전은 적중했고 단학 포마드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매일 사용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 두 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60그램들이 한 통이 71원25전으로 기존제품보다 비쌌는데도 불구하고 도매상들이 회사 앞에 진을 치고 물건을 받아갈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단학은 3~6개월의 어음으로 거래되는 업계의 관행을 깨고 현금으로 물건을 인도하는 새로운 관행을 세웠다. 이 때문에 단학의 위세는 맹렬히 뻗어나가 출하 3~4년 만에 포마드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5~6년 후에는 70%에 이르렀다. 한국화장품은 일본 쥬쥬와 기술제휴한 쥬쥬마담크림 등 여성용 제품이 비싼 가격 때문에 맥을 못추었으나 포마드 덕에 일찌감치 기업의 기반을 굳혔다. 창립 초기 서울 군자동의 2천 평 대지 위에 단층으로 지었던 공장 건물을 5년 만에 2층으로 늘렸다. 종업원 수도 50명으로 출발, 10년 만에 4백 명이 됐다. 한국화장품은 74년 4개 지방에 사옥을 짓고 77년 경기도 부천에 3만 평 규모의 현대식 단일 공장을 짓는 등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62년부터 10여 년간 맹위를 떨친 단학의 공로였다.
장발 유행으로 포마드 스타일 퇴보
정부가 포마드 원료인 피마자 유를 수입금지 품목으로 묶어버린 뒤 국내독점 공급업체가 가격을 턱없이 올려버리는 바람에 원료 가격의 급등으로 한국화장품은 경영난을 겪기도 했다. 기존 시장을 잠식당한 경쟁업체들이 포마드를 덤핑 출하하는 등 싸움을 거는 바람에 출혈을 감수하면서 이전투구를 벌인 일도 있었다. 태평양화학의 서성환 회장과 한국화장품의 임광정 회장은 두고두고 라이벌 대결을 벌였다.
온갖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제왕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온 단학도 어쩔 수 없이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73~74년 무렵 장발이 유행하는 등 남성들의 머리모양과 패션이 크게 바뀌면서 신사의 상징이었던 포마드 스타일이 구닥다리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신식 멋쟁이들은 어깨에 닿을 만큼 장발을 하거나 짧게 머리를 깎더라도 헤어크림 토닉 스프레이 등으로 모양을 냈다. 포마드로 빗어넘기는 올백의 스타일은 대학생층에서 ‘꼰대’라는 은어로 표현됐고, 아버지 선생님 등 흘러간 세대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화장품은 이미 이 같은 포마드의 퇴조가 오기 전인 1960년대 말부터 브랜드 이름을 쥬단학으로 바꾸고 여성화장품으로 주력을 전화, 크게 타격받지 않았다. 다만 창업주 임 회장의 양담배, 약품의 밀수 판매로 원천적인 축재를 하고 외국 기술을 끌어다 주력제품을 만들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도 로레알, 랑콤 등 외국상표 도입으로 막대한 로열티를 지출했다는 원죄에 대한 비난 여론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화장품은 당시 형편없이 낙후된 우리 장업 수준을 선진기술 도입을 통해 크게 끌어올린 공적을 평가해야 한다고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