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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상품 아이디어<17> 럭키 - 하이타이
잿물–양잿물–빨랫비누–하이타이 (빨래문화의 변천)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 19 Mar 2021 04:15 PM
한국기업들은 늘 일본서 시설 수입하고 기술자 초빙 이중부담 결혼답례품의 최고 인기품; 세탁기 개발 후엔 ‘군림’; 환경문제 대두
‘잿물에서 양잿물로, 양잿물에서 빨랫비누로, 빨랫비누에서 하이타이로’
우리 나라 빨래 문화의 변천사다.
합성세제(合成洗劑)의 효시가 된 하이타이(HiTi) 생산이 처음 제안된 것은 1963년.
동남아를 여행한 럭키유지공업 허신구(럭키석유화학 회장) 상무가 간부회의에서 합성세제에 대해 설명했다.
“방콕에 갔을 때 배에서 사는 사람들이 빨래하는 걸 보니 이상한 하얀 가루를 타니까 거품이 생기면서 때가 신기하게 빠집디다. 우리나라 빨래방식은 양잿물을 넣고, 끓이고, 방망이질 하고 … 너무 야만적 아닙니까. 주부들이 추운 겨울날 빨래하는 걸 보면 불쌍합니다. 우리도 그런 세제 한번 만들어봅시다.”
구인회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임원들은 담배만 연신 피워대며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럭키는 비누판매에 총력전을 펴야하는 상황인데 엉뚱한 제안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가루 비누를 쓸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구 회장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건 좋은데… 좀 연구해 보자”며 허 상무의 제의를 묵살해 버렸다.
허 상무는 이에 굴하지 않고 1년여 동안 구회장에게 하이타이 생산을 간청, 1964년 초 드디어 허락을 받아냈다. 구 회장이 이를 허락한 것은 상무의 간청도 있었지만 금성사에서 전기세탁기를 개발 생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합성세제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직원들 하이타이로 빨래 시범 진풍경
우여곡절 끝에 럭키는 1965년 11월 일본으로부터 기계설비를 도입, 경기도 안양시에 연산 3,600톤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처음에는 기계의 성질과 기능을 몰랐고 따라서 원료배합에 애를 먹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품이 안되자 하는 수 없이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1966년 4월 10일 국내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를 생산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제품은 단 1백 그램도 안팔려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첫 제품 생산 한 달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 그 동안에 제품을 선전하느라고 거금 3천만원을 쓴 것이 무척 아까웠다.
처음부터 생산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임원들은 그것보라는 식으로 코웃음쳤다. 책임감에짓눌린 허 상무는 비장한 각오로 비상 판촉전에 들어갔다. 모든 직원들에게 서울, 부산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하이타이 세탁시범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남대문시장과 부산역 광장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럭키직원이 세숫대야에 하이타이를 풀고 빨래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직원들은 10여 명 씩 조를 짜 손수레에 싣고 부산 동래에서 해운대로, 송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행군’하며 곳곳에서 시범했다. 이와 함께 전사적으로 월간 1천 짝의 하이타이 처분운동도 전개했다.
이 같은 노력끝에 66년 말부터 주부들의 관심이 늘기 시작, 이듬해에는 안양공장의 생산능력을 늘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상황이 급변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허 상무는 유행하던 결혼답례품 풍조에 하이타이를 띄우기로 하고 결혼 답례용 제품을 별도로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결혼식에서는 으레 하객들에게 찹쌀떡, 빵 등을 답례품으로 주었는데 먹는 물건은 상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착안한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1968년 봄, 결혼시즌이 닥치며 하이타이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혼답례품은 완전히 하이타이가 주종을 이루었다. 세제를 결혼답례 선물로 준다는 아이디어는 세계 어느나라도 유례가 없다. 발상의 전환이 만든 히트였다.
결혼답례품, 집들이 선물 등으로 호황
69년 5월에는 금성사가 세탁기를 개발, 시판에 나섬에 따라 하이타이 판매는 짝짝궁을 만나 일대 호황을 맞았다. 1970년 9억5천만원이던 매출고는 4년 뒤인 1975년에는 무려 40억 원으로 껑충 뛰어 럭키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주부들이 동네 가게에서 합성세제를 살 때 “하이타이 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합성세제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호황도 잠깐이었다. 합성세제에 의한 수질오염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판매량은 주춤했다. 럭키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인식되던 ‘거품’을 줄이기 위한 신제품 개발에 착수, 난관을 뚫기로 결의했다.
독일계 기술을 도입, 수질공해가 없는 흰색 세제를 개발했다. 이어서 세제의 포장을 기존의 비닐에서 종이용기로 고급화하고 단백질 분해효소를 포함, 세정력과 헹굼성이 뛰어난 수퍼타이를 후속품으로 내놓았다. 수퍼타이는 “담가만 주세요”라는 광고문구로 소비자의 인기를 다시 사로잡았다. 빨래를 비비지 않아도 물에 담그고 세제만 끼얹으면 빨아진다니 주부들이 혹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상품이 히트하면서 87년 매출고는 340억 원에 달했다.
환경오염 벽 부딪쳐 매출 주춤
“90년대 들면서 합성세제로 인한 수질 오염문제가 더욱 높아졌다.”
럭키 최영재 부사장은 이 때문에 저공해 세제개발이 최대 현안으로 부각됐다며 이러한 무언의 사회적 압력이 오히려 신제품 개발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하이타이, 수퍼타이의 후속탄으로 하모니와 수퍼그린이 잇달아 개발됐다.
하모니는 국내최초의 지방질 분해효소를 첨가한 하이테크 효소세제였다. 광고모델로 주부층에 인기가 높은 남성 연예인을 기용, 새 제품 선전에 효과가 높았다. 주부 대상의 생활용 제품 선전에는 여자모델을 쓰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이 관념을 과감히 깨트리고 미국교포 쟈니윤을 기용했다. 이 광고는 “하모니 알아요? 직접 확인하세요”라는 쟈니윤의 다소 어늘한 발음이 시중에서 화제가 됐다. 덕택에 첫선을 보이자 마자 연간 1백억원의 매출실적을 올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제품도 좋았지만 상품명, 광고 모두 우수했던 것이다.
수퍼그린은 석유계면 활성제 대신에 야자에서 추출한 식물성 계면활성제를 100% 사용한 제품이다. 이처럼 럭키는 식물성 개발에서도 경쟁업체를 앞섰다. 수퍼그린은 식물성 원료 때문에 가격이 다소 비싼 것이 흠이었다. 1990년대 들어 저공해 개발에 성공한 후 고농축 세제개발을 서둘렀다. 소비자 구매조사 결과 적은 양으로 세탁력이 높은 상품이면 좋겠다는 반응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나온 것이 ‘한스푼’으로 일반세제의 3분의 1만 사용해도 되는 제품이었다.
저공해 고농축 신제품 국제화 전략
“요만큼”이라는 광고로 주부들에게 첫선을 보인 한스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92년에는 각 언론매체로부터 10대 히트상품의 하나로 뽑혔다. 후속탄으로 나온 한스푼 그린은 사용이 편리하고 우수한 세척력과 수질오염의 최소화 등 합성세제가 갖추어야 할 3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고농축 세제시장에 녹색바람을 일으켰다.
이로써 하이타이로 시작된 럭키의 합성세제 개발역정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눈을 해외로 돌렸다. 1992년 4월 국내업계 최초로 하이타이의 대물림 상품 한스푼을 영국에 럭키화이트(Lucky White)라는 상표로 수출, 선진국 세제와 경쟁했다.
66년 첫선을 보인 하이타이는 50여 년 동안 수퍼타이(효소세제)–하모니(하이테크 효소세제)–수퍼그린–한스푼–고밀도 수퍼타이로 맥을 이으며 장기 히트했다. 한 아이템의 아이디어가 국민생활의 질을 높이고 업체성장의 효자노릇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