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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상품 아이디어 <19> 제일모직 - 골덴텍스
‘마카오신사’가 골덴텍스 걸치며 ‘한국신사’로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 01 Apr 2021 04:51 PM
설탕도, 라면도 필요하지만 입을 옷도 문제 수요 예측 이병철 멸시와 모욕 속 성공시켜
해방 이후 한동안 멋쟁이 남성들은 으레 ‘마카오 신사’로 통했다. 멋쟁이가 되기 위해서는 고급양복을 걸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그 양복들은 대부분 마카오 등지에서 수입된 외제 옷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마카오 신사’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마카오 복지 한 벌 값이 왠만한 사람의 봉급세 달치에 해당하는 6만 환이나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청나게 높았던 양복지 가격을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뜨려 수많은 ‘한국신사’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것이 1950년대 중반 제일모직이 생산한 「골덴텍스」였다.
‘마카오신사’에서 ‘한국신사’ 탄생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제일모직을 설립한 것은 전쟁 후 부흥이 한창이던 1954년이었다. 1년 전 제일제당을 설립, 때마침 불어닥친 「3백경기(광목/밀가루/ 설탕에 대한 특전)」에 힘입어 큰 돈을 번 이씨는 새롭게 진출할 사업을 고심하다가 섬유업으로 눈을 돌렸다.
국내 섬유공업은 6•25로 인한 피해가 컸지만 정부와 미원조기관이 전시하의 의류수요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공업보다도 빠른 속도로 재건이 되고 있었다. 의류 공업시설이 원조물자로 대량유입됐고 여러 섬유분야에서 공장 설립붐이 일었다.
일단 섬유업 진출에 마음을 굳힌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모방(毛紡)과 면방(綿紡) 가운데 어느 쪽 진출이 좋을까를 물었다. 대다수의 임원들은 면방 쪽을 추천했다. 모방은 막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에 반해 면방은 비교적 생산공정이 간단하고 시장도 안정돼 있어 위험부담이 작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최신 면방공장을 세울 경우 과잉투자가 이루어져 기존의 군소공장들이 문을 닫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회장은 강성태(姜聲邰) 상공부 장관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강 장관은 면방기술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사업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며 모방쪽 진출을 권했다. 장관은 또 모방산업이 매우 시급한 수입대체 산업임을 지적, 삼성같이 큰 회사가 이 분야를 선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54년 9월 본사를 대구에 둔 제일모직주식회사가 창립됐다. 그러나 사업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우선 시설자금을 얻기가 어려웠다. 제일모직은 공장설비 도입에 따른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미국 원조기관과 접촉 했으나 미국측은 처음부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기술수준으로는 공장건설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사 공장이 건설된다 하더라도 가동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일모직은 산업은행으로부터 5천8백만 환을 빌려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다음은 공장건설이 문제였다. 다급한 김에 일본 쪽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삼성이 대규모 모방공장을 차려 성공하는 날에는 조만간 자신들이 구축한 시장을 잃게 된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한국 기술수준 얕잡아 본 외국인들 막말
이 회장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본모직(大日本毛織)」 기술담당이사 임경평(林耕平) 씨로부터 공장 마스터플랜 설계 약속을 받아냈다. 여기에는 기계 전부를 일제로 하고 건설감독 역시 일본인이 맡는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제일모직은 임경평의 마스터플랜에 의거한 모직공장 건설과 기계도입 허가를 정부에 신청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는 일제 대신 서독제를 도입하라는 조건부 허가가 떨어졌다.
이 무렵 정부는 모직공장을 직접 운영하기 위해 독일 스핀바우사에 5천 추 규모의 모방기계를 발주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민간 인수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모직은 서독제 기계를 인수키로 하고 스핀바우사에 다시 공장설계를 의뢰했다. 그러나 2개월 만에 도착한 스핀바우사의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한 결과 입지 기상조건 등 여러가지 항목이 한국실정에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제일모직은 스핀바우사의 설계도를 전면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외국에서는 제사(製絲), 염색, 직모(織布) 등의 공정이 전문화돼 있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 제일모직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미국의 유명 모직기계 메이커인 파이팅사의 중역은 자신들의 기계를 제일모직에 팔려다 뜻대로 안되자 이 회장을 찾아와 양팔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한국인의 힘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품이 나오면….어쩌겠다”고 소리를 쳤다.
한국 기술수준을 얕잡아 본 것은 미국인들만이 아니었다. 공장건설 책임자 스핀바우사의 현장감독은 60명의 서독기술자를 최소 1년간 데려다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그마치 3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제일모직측은 제사(製絲), 염색, 가공, 공조 등 4분야에 1명씩 모두 4명의 전문가만 필요하다고 판단, 스핀바우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처음에 제일모직과 심한 의견차를 보이던 스판바우사는 결국 “공장완성 후 사양대로 제품이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주장을 받아들였다.
외제품 선호를 질과 가격으로 맞서
갖가지 시련을 넘어 1956년 5월 2일 공장이 돌기 시작했다. 이 회장과 외국서 기술교육을 받고 돌아온 연수생 등 전직원이 숨을 죽인 채 복지가 짜여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옷감이 나왔다. 손으로 만져보니 어딘지 모르게 힘없는 감촉이 느껴졌다. 회사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 기술진은 각 공정을 면밀히 검토했다. 문제는 마지막 공정인 프레스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술진은 프레스를 조정해서 옷감이 축 늘어지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모직제품 특유의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여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제일모직은 영국제와 견줄 수 있을 때까지 연구개발비를 아끼지 않기로 결정하고 적합한 양모의 선택과 공정의 합리화를 계속 추진했다.
모직물 고유의 고급스런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황금의 직물」이라는 뜻을 지닌 「골덴텍스」라고 이름붙인 시제품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국산품은 질이 추악하다”는 통념이 소비자들 사이에 워낙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직이 계속 품질개선에 주력하고 제품 홍보에도 힘을 쏟자 소비자 인식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마카오 등 외국 복지에 비해 값이 5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품질이 손색이 없는 점은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골덴텍스로 옷을 맞춰입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956년 376만 파운드에 달했던 외국복지 수입은 3년 후 24만 파운드로 줄었다.
이병철 회장 큰 관심 본고장 영국까지 진출
제일제당과 함께 1950년대 초반에 설립돼 삼성그룹 성장의 주춧돌 역할을 했던 제일모직에 대한 이 회장의 애정과 관심은 각별했다. 아직도 제일모직 본사에 「선대(先代) 회장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가 생전에 제일모직에 대해 가졌던 각별한 애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그룹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이 회장은 그의 자서전인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당시 외교관들이 해외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제일모직을 견학,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류공장이 있다는 자부심을 안고 나가게 했다”고 표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회사 덕분에 온 국민이 좋은 양복을 입게 됐다”고 치하했다는 제일모직은 1970년대 들어 세계 섬유공업의 정상이라는 일본을 따라잡은 것에 이어 모직의 본고장인 영국에까지 진출하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세계에서 3번 째로 1백 수 복지(1수는 양모 1그램으로 짤 수 있는 실의 길이를 미터로 표시한 것) 생산에 성공한 데 이어 방적기술의 한계라 일컬어지는 120수 복지까지 생산, 「섬유한국」의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골덴텍스는 구한말 「개화복(開化服」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와 해방 이후 국민 평상복으로 자리잡은 양복을 ‘마카오신사’만이 아닌 서민들까지 쉽게 입을 수 있게 만든 ‘당대(當代)의 히트상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