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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Frida Kahlo(1907~1954)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Jul 18 2021 04:04 PM
육체와 영혼의 파멸에서 우뚝 선 멕시코 국보급 화가 공산주의, 여성해방, 페미니즘의 기수
▲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
프리다 칼로는 헝가리계 독일인 아버지와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의 멕시코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칼로는 자신의 조상을 식민지 유럽과 멕시코 원주민 측이라는 이진법으로 그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고, 평생동안 만성질환에 시달렸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눈을 일찍부터 가졌다. 미술수업을 받았지만 과학에 더 관심이 많았고, 1922년에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준비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다. 그때 학교강당의 벽화작업을 하고 있던 리베라 디에고(멕시코의 국민화가)를 만난다.
1925년에 칼로는 버스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평생동안 30회가 넘는 수술을 받는다. 병상에서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고,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다. 초기작품 중 하나인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에서 그는 어두운 배경으로 다소 추상적이면서도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 Henry Ford Hospital, 1932/ 금속판에 유채/들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 The Fram/1938/파리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 소장 (루브르 미술관 구입)
후기작품에서는 금욕적인 시각과 분명하고 과장되게 표현된 긴 목과 손가락은 이탈리아 피렌체 화파의 아그놀로 브론치노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고 평가한다.
회복 후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 (PCM)에 가입하여 리베라를 다시 만난다. 작품을 보여 주자 리베라는 칼로에게 계속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한다.
1929년 리베라와 결혼한 직후 칼로의 회화 스타일은 변화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멕시코 전통복장인 테후아나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고, 머리꽃 장식과 느슨한 블라우스, 금 보석, 긴 주름 치마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작품 ‘프리다와 디에고(1931)’는 그의 새로운 복장뿐만 아니라 멕시코 민속예술에 대한 관심도 보여준다. 주제는 이전 작품보다 더 평면적이고 추상적이다. 우뚝 솟은 듯이 선 리베라는 그의 직업적인 도구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다. 그는 중요한 예술가로, 그 옆에 작고 연약하며 어두운 피부를 가진 칼로는 손을 잡은 채 자신이 원했던 역할, 즉 전통적인 멕시코 아내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 두 명의 프리다/1939/멕시코 근대미술관
▲ 부러진 기둥/1944/ 멕시코 시티, 돌로레스 올메도 박물관
칼로는 여러 도시에서 벽화 의뢰를 받은 리베라와 함께 미국여행을 하는 동안 (1930 ~ 33) 이 작품을 그렸다. 그때 디트로이트에서 유산을 겪고 또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칼로는 가장 끔찍한 작품을 그렸다. ‘Henry Ford Hospital (1932)’에서 칼로는 황량한 풍경 속에 병원 침대에서 출혈하는 자신을 묘사했으며, 작품 ‘My Birth (1932)’에서는 다소 금기적인 출산 장면을 그렸다.
1933년 칼로와 리베라는 멕시코로 돌아와 다리로 연결된 별도의 개별 공간으로 구성된 새 집에서 살았다. 그곳은 예술가와 정치가들의 모임장소가 되었고 부부는 칼로의 작품을 옹호한 초현실주의 선두주자인 레온 트로츠키와 앙드레 브르통과 교류했다. 브르통은 칼로를 독학한 초현실주의자로 묘사하면서 칼로의 첫 개인전 브로셔에 서문을 썼다. 이 전시회는 1938년 뉴욕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열렸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칼로는 파리로 가서 마르셀 뒤샹을 비롯한 칸딘스키, 피카소 등의 화가들을 만난다. 그들도 칼로를 초현실파로 추켜세웠지만 칼로는 거부했다. 자신은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그린다'고.
루브르 박물관은 또한 칼로의 작품 ’The Frame (1938)’을 구입했다. 그는 루브르박물관 컬렉션에 소장된 최초의 20세기 멕시코 예술가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혼외정사로 결혼생활을 파탄지경으로 만든 리베라 때문에 1939년에 이혼했다가 그 다음해에 다시 결합했다. 부부는 코요아칸에 있는 어린 시절의 집 La Casa Azul로 돌아갔다. 1943년 교육부의 미술대학인 La Esmeralda에서 회화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그럼에도 계속 작품을 제작했다. 다양한 헤어 스타일, 의복, 도상학으로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며, 항상 냉정하고 확고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여 주었다. 칼로는 유명해졌다.
▲ 프리다와 리베라 디에코/1931/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53년, 침대에 누워 멕시코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 참석했다. 1년 후 카사 아눌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사망원인은 폐색전증으로 기록됐다.
칼로가 사망한 후 리베라는 카사 아눌을 박물관으로 재설계했다. 리베라가 죽고 1년 후인 1958년에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 대중에게 공개됐다. 1944 ~ 54년 사이에 쓴 칼로의 일기와 편지는 1995년에 모두 출판됐다. 칼로는 생전에도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정리/주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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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Admiral Lee ( alwaysthanx**@gmail.com )
Jul, 22, 09:50 PM이 화가 프리다 불쌍하네요. 그의 예술가 정신은 모든 예술인의 모범이구요. 훌륭합니다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