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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1986~1948)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Jul 21 2021 09:44 AM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전통과 개화사상이 빚어낸 비극의 예술가
▲ 자화상/1933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1896년 수원군의 진보적인 가문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육과 학문에 대한 자각과 관심을 갖게 되었던 시기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다.
1913년 나혜석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자고보를 졸업했으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당시 일본 유학중이면서 새로운 시대를 인식하고, 서양문화 수용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던 오빠 경석(景錫)의 배려 덕분이었다.
▲ 김우영의 초상화/1928
▲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1913년 동경으로 건너간 나혜석은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여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가 된다. 그는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 선구적인 사고와 뚜렷한 개성을 표출하며, 최초의 근대적 여권을 주장하는「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을 기고한다.
1918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자 교편생활을 하게 되고, 1919년 23세 때 3·1운동으로 수개월 투옥된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법정변호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결혼에 이르게 된다.
혜석은 결혼후 더 적극적인 문필활동과 작품 제작에 열중하였는데, 당시 『폐허(廢墟)』창립동인으로 문학활동과 일간지(日刊紙)를 통한 광범위한 계몽사상의 전개는 오늘날에도 근대문학 사상면에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21년 3월에 열린 첫 개인전은 평양에서 열린 김관호 개인전에 이어 한국에서 개최된 두번째의 개인전이었으며, 서울에서는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전시회를 ‘장안을 들끓게 했던 신진 여류(女流)의 기염’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일본은 문화정책의 일부로 1922년 ‘조선미술전시회’를 창설했다. 나혜석은 제1회 선전에서 3등상을 수상했고 이후 연속 출품하였다.
192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특전으로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로 모스크바를 경유 세계일주 여행을 하게 된다. 이때 나혜석은 파리에서 8개월간 머물면서 화가로서 다각적인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새 바람을 일으킨 20세기 미술경향을 접하게 된다.
▲ 나혜석 <파리 풍경>,1928, 채 23.5 x 33cm 개인 소장
▲ 나혜석 <별장>, 1935,목판에 유채 22.5 x 33cm, 개인소장
그곳에서 야수파 계열의 진보적 화가가 지도하는 연구소에 다니며 자신의 그림에 진취적인 전환을 시도하는 한편,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작품제작도 하게 된다.
이 때의 작품으로는 <불란서 마을 풍경>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 낸 작품으로 탄탄한 조형어법에 이어 새로운 표현기법을 얻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일주여행 전의 그림과 그 후의 그림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그림이 예술적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터치가 보다 자유로워지고 형태는 주관적인 재구성을 가하게 되어 활달한 필치 속에 서로 뭉개지기도 하면서 보다 표현성이 강한 성격을 띄게 된다. 초기 그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생략기법과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단순화시킨 화면의 구도를 구사하면서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터득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보낸 새로운 생활과 자극은 그녀 자신만의 체험이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사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29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돌아 귀국길에 오르는 도중에, 동경에서 이과전(二科展)에 작품 <정원>을 출품해 입선을 하였다.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 수원 불교 포교당에서 여행중 작품으로 귀국 개인전을 개최했다.
세계여행으로 그녀 자신의 내외적 성숙이 이루어졌으나, 파리에서 중추원 참의(慘議)로 외교상 파리에 와있던 최린과의 부적절한 접촉 사실이 문제가 되어 1931년 봄, 35세의 나이로 김우영과 이혼을 하게 된다.
▲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사회 비판력과 지성을 갖춘 한 여성으로서 남성위주의 사회제도와 인습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자유의 몸으로 독자적인 삶의 길에 들어선다.
이혼 후에도 제10회 선전 출품작이 특선상을 받게 되어 일말의 희망의 빛을 보이기도 했으나1933년 이후 나혜석의 작품은 선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스케치를 남기긴 했지만 이미 재기의 빛은 퇴색하고 있었다.
1934년에『삼천리』지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다음해 1935년 39세 때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소품전을 열었으나 이혼으로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 실패하고 정신적으로 더욱 좌절하게 됐다.
말년에는 극도의 신경쇠약과 고독, 참을 수 없는 내적 고통으로 언어장애와 수족이 부자유스럽게 되었지만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후 1937년 41세로 서울 종로구 청운 양로원에 거처를 잡게 됐다. 반신불수의 몸은 더욱 그의 말년을 비참하게 했다. 1949년 3월 14일 관보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시립자제병원에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의 53세 가량 여자 행려병 환자가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혜석의 불행은 전통사회의 유교적 가치관과 신여성의 개화사상의 충돌이 빚어낸 시대적 비극이었다.
나혜석의 작품은 여성주의적 내용과도 무관할 뿐만 아니라 주제 선택이나 감수성에서도 철저히 비여성적이다. 그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꽃, 정물과 같은 여성적 주제를 택하거나 작가의 성을 노출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색상, 섬세한 선묘를 추구하지 않았다.
정리/주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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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ral Lee ( alwaysthanx**@gmail.com )
Jul, 22, 09:47 PM많은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유익했는데 그만 두시나요? 마지막회분을 나혜석으로 마감했네요. 의미깊어요. 또 다른 지상 전시회 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