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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1504~ 1551)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Jul 26 2021 06:49 PM
나는 조선의 화가다 어둠 속에서도 보석은 빛나다
▲ 이종상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화
그동안 억압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예술적 재능을 거침없이 발휘한 50명의 여성예술가들을 제한하여 연재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숱한 여성예술가들이 겪어 온 길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별 다를 바 없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조선 최고의 여성화가 신사임당의 삶과 예술을 엿본다. 그는 ‘현모양처’의 대명사였다.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기 전에,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예술가였다.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태생인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강릉은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쪽으로는 바다가 접한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예국(濊國-삼국시대 초기의 부족국가)의 수도로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 맹호연 시가 담긴 사임당 산수도 ‘이곡산수병’
▲ 신사임당 ‘초충도’ 8폭 중 ‘양귀비와 도마뱀’, 16세기초, 32.8x28.0cm /국립중앙박물관
사임당의 생애에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강릉에 터를 둔 외가이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강릉 출신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외손녀이다. 이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신사임당과 모친 이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때문에 사임당과 그의 어머니가 친정 쪽에서 거주하던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시대적 사실이다.
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췄다는 태임(太任)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사임당의 롤모델이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모사했으며,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 신사임당 ‘초충도’ 중 ‘가지와 방아깨비’ /국립중앙박물관
▲ 신사임당 ‘초충도’ 중 ‘수박과 들쥐’ /국립중앙박물관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율곡 덕분에 정경부인이 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율곡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은 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 가는 화가라 칭했다.
사임당은 산수, 포도, 대나무, 매화꽃, 그리고 초충(草蟲-나비, 벌, 메뚜기 등 풀벌레)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다뤘다. 「초충도」들은 한결같이 단순한 주제, 간결하고 안정된 구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표현, 섬세하고 부드러운 묘사력, 산뜻하면서도 한국적 미감의 품위를 지닌 색채감각 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사실상 조선시대의 모든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분야의 절대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작(眞作)보다는,그의 작품이라 추축되는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비슷한 구도의 초충이 그려진 여덟 폭의 병풍인데,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의 상징으로써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에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비롯되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게 됐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의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그의 모성의 신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잣대였다.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됐다. 이는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시켰고, 다양한 렌즈로 그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다.
앞으로 사임당이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주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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