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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와 이승훈 선생 (1)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이유
- 캐나다 한국일보 (news@koreatimes.net)
- May 05 2022 11:10 AM
평북 정주에 1907년 설립된 오산(五山)학교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독립운동과 3.1절 ‘혁명’을 이해하려면 오산학교를 알아야 한다. 이 학교는 누가 창립했는가. 어떤 역사를 가졌고 어떤 인물들을 배출했는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에 소재.
남강 이승훈 (李昇薰)
실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종교인
1864년 3월25일 황해도 출생 ~ 1930년 5월9일
이승훈 선생은 빈한한 황해도 농촌 가정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놋그릇 가게의 노동자가 되었으며 10여 년간 행상으로 사업을 알고 자본을 축적했다. 그후 공장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공장경영으로 축재만 한 것이 아니라 경영방법 개선으로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대우했다. 이로서 노동자들의 생산능률이 오르고 품질도 발전,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당시 소 1마리에 1냥 하던 시절 그는 70만 냥, 즉 소를 70만 마리나 살 수 있는 거부였다. 조선 물가를 좌지우지했으나 불행히도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파산했다.
1905년(광무 8년) 일본과 을사조약 체결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 만민공동회에서 선각자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이 깨달아 40대에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그는 40대였다. 그는 민족의 중흥은 교육에 있다고 보고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를 세워(1907년) 인재양성에 힘썼다.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발기인 1,170 명을 확보, 대학교를 세우려고 모금활동을 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천도교, 불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그 이유로 일제는 그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오산학교 교원들도 모두 검거되고 학교건물과 같은 건물의 교회는 경찰이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인근의 거부 김기홍이 사재를 내놨기 때문이었다. 불과 4개월만이었다.
오산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 함석헌(왼쪽)과 화가 이중섭.
이승훈 선생은1922년 가출옥하자 마자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직을 맡았고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사업에 더욱 깊숙히 개입했다.
오산학교는 류영모, 함석헌, 화가 이중섭 등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학교는 중등 교육기관(후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이었고 무엇보다 민족지도자 양성의 요람이었다.
초기부터 일반 학문 외에 군사교육을 병행했다. 석학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한뫼 이윤재, 횡보 염상섭, 안서 김억 등 최고의 실력있는 유명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1934년 1월 31일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본관이 전소되었다. 그러자 각계에서 성금이 답지하였으며 학교의 이사 박용운이 거금 2만원을 기부하였다. 이 돈으로 불탄 본관을 비롯해 대강당·과학관·체육관·수영장 등 근대식 교육시설을 신축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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