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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해밀턴 부인' <중> 대사의 부인은 넬슨제독의 정부였다
상류사회 진입한 하층민 출신 미인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 12 May 2022 09:29 AM
■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
해밀턴 경은 1758년 1월에 캐서린 바로우(Catherine Barlow, 1738~1782)와 결혼하여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났으나 슬하에 자녀 없이 1782년 8월 캐서린이 44세로 사망했다. 52살의 해밀턴 경은 실의와 슬픔에 차 있었다.
1785년 엠마는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그레빌의 말만 믿고 떠밀리다시피 어머니와 함께 나폴리로 왔지만 결국 그녀의 '구세주'였던 그레빌의 배신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점차 윌리엄 경의 사치스런 환경과 매력적인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간다.
윌리엄 해밀턴 경(Sir William Hamilton, 1730~1803)은 영국 외교관으로 골동품수집가, 고고학자이며 화산학자였다. 1764~1800년간 나폴리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베수비우스 산과 에트나 산의 화산을 연구한 업적으로 1770년 영국왕립학회가 매년 수여하는 최고 과학업적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구한 골동품들을 영국으로 가져가 팔기도 했으며 그 중 '그리스 꽃병'은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윌리엄 경은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그녀에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역사, 그림, 무용, 노래 등을 가르치며 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 이유 등을 설명해주면서 엠마에게 자상하게 대했고 엠마는 윌리엄 경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반면 윌리엄 경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귀족 명사들이 참석하는 만찬이나 이벤트에 엠마가 등장하여 노래부르고 춤추며 손님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접대하는 모습에 만족한다. 더욱이 조각이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엠마가 활인화(活人畵, tableaux vivants)하는, 이른바 '엠마의 자태(Emma's Attitudes)'에 매료된다.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 윌리엄 경은 영국 국왕의 허락을 받고 1791년 9월6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당시 26세인 엠마는 60살의 해밀턴 경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합법적인 '엠마 해밀턴 부인(Emma, Lady Hamilton)'이 된 것이다.
■ 넬슨과 엠마 해밀턴 부인과의 염문
1798년 9월22일, '나일 해전'에서 승리한 살아있는 전설 넬슨 제독이 18살의 의붓아들 조사이아 니스베트(Josiah Nisbet, 1780~1830)와 함께 나폴리를 방문한다. 조사이아는 넬슨 함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는 넬슨을 존경하여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엠마와 해밀턴 경은 넬슨을 그들의 저택이 있는 팔라조 세싸(Palazzo Sessa)로 영접한다. 마침 9월29일이 넬슨의 40세 생일이라 무려 1,800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던 중 넬슨이 쓰러진다. 당시 넬슨은 오른팔이 없고 치아도 거의 빠진 데다 기침으로 고생하고 극도의 피로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넬슨을 그녀의 침실로 데려가 9일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이후 엠마는 공공연한 넬슨의 비서이자 통역관 및 정치적 중개자가 된다. 신사(Gentry)들이 여는 파티의 쇼걸이었던 하층민 출신 엠마가 귀족에다 유럽의 명사·예술가로 변신하여 영국 전사(戰史)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의 정부가 된 스캔들은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당시 세기의 가십의 정점에 섰다.
그런데 이즈음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나폴리에도 불어닥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를 비롯한 왕당파 귀족들은 시칠리아로 피신한다. 카롤리나 왕비는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시집갔다가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친언니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1765~179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계몽주의 절대왕정의 3대 계몽군주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요제프 2세(Joseph II, 1741~1790)이다.
1799년 7월, 이때 왕비와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엠마가 넬슨과 왕비 사이의 중개역할을 하여 넬슨이 나폴리 탈환에 참여, 반왕당파 반란을 진압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함으로서 나폴리 왕으로부터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다.
카롤리나는 1768년 16살에 나폴리로 시집가서 총 17명의 자녀를 낳았고(이 중 8명만 생존), 무능한 남편 페르디난도 1세를 대신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여 낙후된 나폴리의 내정을 튼튼히 했던 여장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고 1806년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1814년 9월8일 62세의 나이로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1800년 윌리엄 경은 나폴리 대사직을 그만 두고 엠마와 넬슨 등과 함께 런던으로 귀향한다. 그후 엠마는 아예 넬슨과 동거하며 1801년 딸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1801~1881)을 출산한다.
한데 넬슨과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던 불륜 관계였다. 한편 넬슨은 엠마와의 혼외정사 후 다시는 본부인과 함께 살지 않았지만 넬슨 부인은 결코 이혼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밀턴 경은 처음엔 불순한 목적으로 엠마를 떠안았지만, 누가 봐도 조카의 추문을 덮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나이도 든 만큼 새파랗게 젊은 아내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일 엠마가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다.
넬슨은 1805년 잠시 런던으로 돌아와 엠마와 재회한 후 다시 원정에 나서는데, 엠마는 넬슨이 떠난지 얼마 안 된 10월19일에 쓴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 속에는 딸 호레이샤 앞으로 쓴 답장편지와 엠마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엠마에게 쓴 편지에서 넬슨은 "엠마 해밀턴이 자기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사후 유산을 물려줄 것"을 분명히 했다. 이 편지를 쓰고 이틀 후인 10월21일,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한다. 이 편지가 유언장이었던 셈이다. [계속]
손영호 칼럼니스트 (토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