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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동화중학을 폐쇄하자 항일투쟁 결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 “돈 없다고 학교를 닫아? 내가 돈 만들겠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19 2022 08:33 AM
사라지는 민족정기(精氣)를 다시...
▲ 약산 김원봉
어린 시절
김원봉은 이름은 원봉(元鳳)이요, 호는 약산(若山)이라고 하였다. 그는 서기 1898년 음력 8월 13일 경남 밀양 근처에 있는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주익(金 周益),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 집안에서 시집왔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나고 11월 7일 이른바 '을사보호 조약 이 체결되자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망국을 한탄하며 자결하던 이 해에 그는 여덟 살 된 소년으로서 통감 첫 권을 옆에 끼고 매일 마을에 있는 서당에 가서 글을 배웠다.
나라 밖에서는 전명운(田明雲) • 장인환(張仁煥) 두 의사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데 적극 협조한 친일 미국인 일본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살해하고 나라 안에서는 한국의 침략을 위해서 만들어진 동양척식주식회 사법이 공포되던 1908년, 열 한살 된 원봉 소년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근처에 있는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르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고 의사 이재명(李在明)이 매국 노 이완용(李完用)을 종현(鍾峴)에서 칼로 찌른 것은 그 이듬해 일이었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나라운을 다만 몇 사람의 의거로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10년, 조선은 마침내 국토와 나라주권을 다 함께 일본의 손에 바치고 말았다. 바로 이 해에 약산은 13세 소년으로 동화(同和)중학 2학년에 편입하여 통학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꽉 메웠다.
‘원수의 왜놈들! 더불어 하늘을 이지 못할 우리 민족의 원수! 도대체 저놈들을 어떻게 하면 나라 밖으로 몰아내고 다시 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일인(日人)들이 나막신짝을 딸깍거리며 마을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소년의 조그만 주먹은 저도 모르게 불끈 쥐어지고 또 쥐어졌다. 이러한 그의 가슴속에는 물론 조선민족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증오와 분노심이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 철저한 항일 사상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동화중학교장이던 전홍표(全鴻杓)란 분이었 다. 전교장은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지사의 한 사람이었다. 날마다 시간마다 어린 학생들 앞에서 전교장이 힘주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 민족의 원수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라도 게을 리해서는 안 된다는 부탁 말씀이었다.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또 언제나 비참하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교장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음성이 떨렸다.
“미래는 어린 너희들 것이다. 너희들이 분발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조국 광복의 대업을 이룰 것이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쉽사리 퍼져갔다. 일본은 점점 전홍표 교장을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조선 소년들에게 불어넣는 사람한테는 교육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 다. 일본은 마침내 동화중학이 재단법인이 아니라는 구실 로 폐쇄를 명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수모를 눈앞에 본 소년 김원봉은 극도로 분개하였다.
‘왜놈들은 우리 학생들에게서 공부할 학교까지 빼앗아 가는구나.’
그는 그날로 마음속 깊이 결심하는 바가 있었다.
'우리 학교가 폐쇄된 것은 재단법인이 아니라고 트집을 잡혔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학교는 다시 열 수가 있다. 오냐, 내 손으로 돈을 만들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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