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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국 일본에 대항, 조선 위해 싸울 나라 없다”
1년 365일이 3ㆍ1절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16 2022 09:37 AM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4>
그때 고국을 떠나 멀리 중국 남경으로 간 약산·청정(靑汀)·약수(若水) 세 사람은 즉시 금릉(金陵)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어를 배웠다. 그때 까지만 해도 약 산은 여전히 독일 유학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정세가 눈부시게 변하는 통에 약산은 그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일제강점기 시절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찾은 곳이 난징대학(금릉대학)이었다. 이곳서 학문을 쌓고 그 후 임시정부의 수립, 일제로부터의 독립, 건국까지 일조했다. 중국 대학 중에서는 한국과 인연이 아주 깊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윌슨 대통령에게 휴전을 제의한 것은 1918년 10월 3일이었다. 이어서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을 하고, 10월 30일에는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고 터키가 휴전했으며, 11월 9일에는 독일에 혁명이 일어나 사회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제정세가 급전함에 따라 약산은 모든 계획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두 동지와 함께 여러 날을 두고 상의한 결과 세 가지 결정을 보았다. 첫째는 서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상해에서 잡지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잡지 이름을 『적기(赤旗)』라고 하자고 제호까지 결정해 놓았다. 그들 세 사람은 누구도 결코 '과격파가 아니었으나 그들은 이런 제호를 붙인 것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세째로 그들의 마지막 결정은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 이러한 의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마침 상해에서 같은 금릉(金陵)대학생 서병호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당시 상해에서는 여운형(呂運亨)·이광수(李光洙) 등이 모여서 천진에 있는 김규식(金奎植)을 청해다가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결성하려 했다. 여운형 등은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각국의 대표들과 만나서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호소하고 여러 나라의 동정을 얻어 국토와 주권을 되찾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김약산은 이런 생각을 가진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주장을 달리하였다. 김약산은 나라를 독립하는 데 있어서 외교운동을 위주로 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 또는 민족이 살고 죽는 중대한 문제를 외국인들에게 호소하여 오직 그들의 동정을 얻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해 보자는 것은 결코 될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될 일이었다. 더구나 그때 파리회의에 모여드는 각국 대표들이란 모두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국가를 대표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이긴 전승국으로서의 권위와 교만을 가지고 회의에 참 석하여 배상금을 결정하고 영토를 나누어 가지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이 혹 전쟁에 진 나라라면 몰라도 일본은 당당한 연합국의 한 나라로서 승전국이 아닌가.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연합국이 저희들의 우방인 일본과 원수를 지어 가면서까지 약소민족을 위해서 싸워줄 것인가.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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