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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없이 나선 3·1운동에 실망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5>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23 2022 09:28 AM
일본대표 암살 위해 파리에 암살자 보내 숨겨 간 권총 동포가 빼돌려... 거사 실패
그러나 김약산 자신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고 하였다. 그 목적은 외교사절로서 보내자는 것이 아니라 자객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연합국의 대표사절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일본 대표를 암살함으로써 조선민족의 혁명정신을 드높이자는 것이었다. 김일(金一)이라는 사람이 이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김일은 김약산이 4년 전에 무전여행을 떠났을 때 부산에서 만나 서로 흉금을 털어 놓고 민족을 걱정한 김철성(金鐵城)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이에 일본에 가서 중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와서 오송(吳淞)의 동제(同濟)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는 약산보다 두 살 위인 스물 셋이었다.
러나 모처럼의 이와 같은 계획도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권총을 구하고 여권을 입수하여 겨우 파리까지 갈 수 있었으나, 김일이 여러 날을 두고 일본대표 사이 오지(西園寺公望)의 동정을 살피며 그를 저격할 기회를 노리다가 막상 거사를 하려고 보자기를 풀어 보았을 땐 그 속에 깊이 간직하여 두었던 무기와 실탄이 어느 틈엔가 없어져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당황하였다. 만약 보통 도적의 짓이라면 어찌 권총만 훔치겠는가. 틀림없이 도적의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도적이 과연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비밀리에 자기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자가 있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신변의 위험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도 무기 없이는 자기의 사명을 다할 도리가 없어서 그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급히 파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뒤에 판명된 일이지만 그때 권총을 김일의 보자기에서 없앤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조선동포였다.
그 이듬해 1919년 2월에 김약산은 이여성과 함께 남경을 떠나 봉천으로 갔다. 길림(吉林)에 가 있던 김약수로부터 곧 봉천(奉天) 모여관으로 와달라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김약산은 그의 오랜 꿈인 군대 조직을 하기 위해서 우선 농토를 수중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약수가 길림에 간 것은 농토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약산과 이여성은 봉천으로 가는 도중에 제남(齊南)에서 며칠을 묵었다. 그들은 어느 날 아침 고국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중국의 각 신문이 이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것이 곧 3·1운 동이었다. 두 사람은 고국 동포들이 침략자 일본에 반항하여 일제히 궐기한 것을 알고 가슴이 벅차는 흥분과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며칠 묵으면서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좀더 자세히 알고 또 독립선언서를 읽어보고 약산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처럼의 그 운동은 약산이 기대한 무력항쟁이 아니고, 독립선언서의 내용이 너무나 허약하고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무기 없이 싸우는 항쟁이 과연 우리의 국내로부터 강도 일본을 내어쫓을 수 있을까. 독립만세 소리가 삼천리 강산을 울릴지라도 다만 그것으로써 국토를 찾고 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약산은 마음이 한없이 답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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