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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평화시위에 기관총·대포 동원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6>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30 2022 10:01 AM
3월 1일을 기하여 전 조선민중은 마치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듯 세찬 기세로 일대 시위운동을 벌였다. 손에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소리 높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운동은 거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지도자들은 민중에게 평화적 시위를 벌일 것을 당부한 것이다. 민중은 빈손으로 다만 자유를 부르짖었다. 수만, 수십만의 군중이 오직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거리마다 시위대가 가득히 누볐다. 이러한 평화적 시위로 왜적의 관공서나 경찰서나 또는 감옥소는 별로 파괴되지 않았으며 일본인 관리나 경찰 가운데 죽거나 부상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 했다. 이토록 비무장·비폭력인 조선민중의 평화적 시위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 3.1 독립선언 후 수많은 민중들이 만세를 외치며 미국 영사관 앞을 지났다. 오른쪽 사진은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동원된 일본 군인들.
수원(水原)·선천(宣川)·수안(遂安) 등 각지에서 일본군은 만세군중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기관총과 대포까지 동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거나 혹은 부상당하고, 투옥됐다.
무력으로 이 운동을 진압한 그들은 운동의 폭풍이 지나자 이번에는 조선인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일제는 총독이던 일개 군인인 하세가와(長谷川)를 불러들이고 그대신 사이또(齋藤實)라는 아주 교활한 자를 보내 서 그때까지의 무단정치를 바꾼다면서 문화정책이라는 것을 새로 표방하였다. 이제까지 치안을 떠맡던 헌병의 옷을 갈아 입혀 순사를 만들고 관리와 교원에게서는 차고 있던 칼을 거두어 갔다. 조선인 관리와 학교 교사의 봉급을 약간 올려 차별대우를 철폐한다고 했으며 몇 종류의 신 문·잡지의 발간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준다 했으며, 부의원 · 군의원 등의 괴뢰제도를 만들어 정치에 관여하는 기회를 준다 하였고, 매국노와 반동분자들을 이용하여 자치참정권 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또 시천교(侍天敎)·보천교(普天敎) 등의 괴상한 교리로 조선인을 현혹시키는 무리를 은근히 조장하여 민중을 더욱. 우매하고 몽매스럽게 이끌려고 노력하였다.
김약수
이야기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김약수가 그토록 성급히 약산을 봉천으로 부른 까닭은 그 사이 자신의 심경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길림에 와서 오랜 동안 머무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농토를 널리 구하여 보았으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하는 농토가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좋은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그는 휘문중학교장 박중화(朴重華)로 부터 빨리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의 마음은 적지 않게 동요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약산에게 전보를 쳤던 것이다. 그는 약산을 봉천까지 오라고 해서 이런저런 문제를 상의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지가 남경에서 봉천까지 오기도 전에 국내로부터 3·1운동이 터졌다는 소식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어서 고국으로 돌아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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