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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에 두 발의 폭탄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1>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29 2022 09:46 AM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1> 철통보안 건물에 어떻게 잠입했을까 범인 오리무중... 헌병·경찰 검거에 혈안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10분경 서울 왜성대 조선총독부 청사 2층에 있는 회계과와 비서과에 각 1개씩 폭탄이 투척되었다. 비서과의 것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의 것은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발되어 주변 일대가 파괴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전 서울시는 크게 놀라고 왜적은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각처에 비상망을 치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서 눈에다 불을 켜고 덤볐다. 그러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에는 도무지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 경복궁 흥례문(興禮門) 권역을 헐어낸 자리에 건립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전경. 우리는 '중앙청'이라 불렀다.
첫째, 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이 파수를 보고 있어 총독부 관리나 고원 또는 용원이 아니면 아무나 임의로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정문 옆에 별도로 작은 문이 달려 있긴 했으나 그곳으로 출입을 할 때도 역시 헌병과 경찰의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물며 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사람이 백주에 청사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것이 첫째로 해석하기 어려운 의문점이었다.
둘째, 설혹 대담하기 짝이 없는 자가 요행히 헌병 · 경찰의 눈을 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더라도 폭탄을 던진 뒤에 범인이 무슨 수로 도망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에는 이미 헌병과 경찰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총독부 안팎을 겹겹이 에워 싼 뒤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끝내 진범은 고사하고 단 한 명의 용의자조차 잡지 못했다.
셋째, 다시 백보를 양보하여 워낙 뜻밖의 일이라 모든 사람이 놀란 나머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범인은 그 틈을 타서 곧 몸을 빠져 달아났다 하더라도 대체 그는 어디로 가서 몸을 숨길 수 있었겠는 가가 의문이다. '이 일이 일어나자 그 즉시로 서울 거리마다 경찰이 깔리고 골목마다 밀정들이 설쳤다. 수사망은 단지 경성에만 퍼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적은 또 한편으로 범인이 멀리 해외로 도망갈 것을 방지하여 국경을 엄중 봉쇄하고 정거장마다 정탐의 무리를 배치해 놓았다. 그렇지만 그 뒤로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석 달이 되도록 그들은 범인은 고사하고 사건의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그때 사건 돌발 직후에 한 수상한 사람이 총독부로부터 뛰어나가는 것을 분명히 자기 눈으로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위에는 검은 옷 아래는 흰 옷을 입었다고 한다.
이날 검고 흰 옷을 입은 자로서 공교롭게도 남산공원에 올라갔던 사람들은 하나 빠짐없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7개월간을 두고, 혐의자로서 서울 각지에서 검거된 사람은 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왜적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범인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었다. 혐의자 중에는 “내가 범인이오” “내가 총독부에 폭탄을 던졌소”라고 거짓 자백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 때문에 저도 모르게 불어대는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범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은 마침내 그 다음해가 되어 이른봄 3월에 중국 상해 황포탄(黃浦灘)에서 일본의 유명한 군국주의자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완전히 미궁에 빠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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