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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폭탄사건은 김봉남이 거행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2>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06 2022 09:24 AM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2> 꾸밈없고 거짓없는 진정이 마음 움직여
조선총독부 폭탄사건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익상(金益 相), 본명은 김봉남(金鳳南)이었다. 그는 고향이 서울이며 노동자 출신이었다. 본래 용산 철도국에 공원으로 여러 해 동안 근무하다가 1921년 6월에 만주 봉천으로 가서 광성 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직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소원이 자라서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마음에 없는 직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오늘이라도 곧 비행학교로 달려가고 싶었다.
▲ 2021년 김익상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한 국가보훈처 자료. 국가보훈처 제공
그는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후 얼마간의 여비를 마련하여 중국의 천진·상해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다는 광동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가 목적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중국은 끊임없는 내란의 와중에 있었다.
북방에서 안휘파(安徽派)와 직예파(直諫派)가 서로 반목했고 남방에서는 또 광동파(廣東派)와 광서파(廣西派)가 서로 싸웠다. 남방은 한때나마 손문의 손으로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그가 북벌을 단행하려 할 때 진형명 (陣炯明)이 실력으로 손문을 몰아내고 일시 정권을 장악하였다가 다시 권토 중래한 손문 일파에게 쫓겨났다. 김익상이 모처럼 광동까지 내려갔을 때 이 혼란 가운데 비행학교는 이미 폐쇄된 지 오래였다.
그는 실망 속에 다시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그가 약산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약산은 그때 동지들과 더불어 이곳 북경에서 다음 활동을 위하여 갖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익상은 김창숙이라는 사람의 소개로 의열단 의백 김 약산과 회합하였다.
그는 자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던 이 유명한 혁명가가 뜻밖에도 젊다는 것에 우선 놀랐다. 약산은 그때 27세 청년인 김익상보다도 3살이나 아래인 24세 청년이었다. 그러나 비록 나이는 아래라도 생각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였다. 자기는 그저 막연하게 비행사가 되어 볼까 하였으나 그렇다고 꼭 장래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약산은 달랐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민족과 동포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 젊은 혁명가는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오. 조선민족은 능히 적과 싸워 그들을 몰아낼 힘이 있소. 그러므로 우리는 앞장서서 민중을 각성시켜야 하오. 이것을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김익상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산은 특별히 웅변에 능한 것도 아니었다. 또 용모가 남달리 뛰어나서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슨 위압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얼굴이요. 평범한 말 씨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꼭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여 하는 말도 아니건만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말이었다. 담담한 가운데 한없는 정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지성(至誠)이 ——그렇다, 지성이 그토록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꾸밈없고 거짓없는 진정 그대로의 그의 언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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