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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과연 담대한 열사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4>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20 2022 11:58 AM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4> 일본인 아버지 행세... 한·만 국경 경비 통과 부부가 만나 하룻밤 자고 다음날 총독부로...
수색을 미리 염려하였기 때문에 김익상은 봉천서 차를 바 꾸어 타자 승객 가운데서 자기가 이용하기 좋은 인물부터 물색했다. 차안을 둘러보니 저편 구석에 두어 살 된 어린아이를 데리고 앉은 젊은 왜녀 하나가 눈에 띄었 다. 동행은 없는 것 같았다. 김익상은 곧 그 앞으로 갔다. 마침 건너편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앉으며 즉시 그 왜녀(일본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왜녀는 그를 반겼다. 어린것 하나만 데리고 젊은 여자 혼자 가는 여행길은 몹시 고독하고 또 불안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말동무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처음 만난 학생이지만 그 학생은 자기와 같은 일본인이 분명하였고 그 언어 행동이 대단히 쾌활하고 명랑하게 보였다. 더구나 그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서울까지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김익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왼쪽). 오른쪽 사진은 국가보훈처의 김익상 의거 홍보 자료. 국가보훈처 제공
그들은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벌써 음식을 나누어 먹 고 가정형편을 서로 이야기할 만큼 친숙 해졌다. 그러는 사이에 기차는 한만국경에 도착하였다.
객차로 형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차내를 두리번거리며 승객들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을 보면 그들은 용서없이 주소와 성명을 묻고 어디서 오느냐? 어디까지 가느냐? 무엇 하는 사람이냐? 무엇 하러 가느냐? 가진 것은 무엇이냐? 이밖에 또 없느냐? 미주알고주알 캐어묻고 몸과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일본형사들은 정말 엄중히 조사를 해야만 했던 의열단원 김익상을 말 한마디 조사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시켰다. 젊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여행을 하는 일본인 학생으로만 믿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김익상은 무사히 국 경을 넘었다. 그러나 난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 남대문 정거장의 여객 검사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일본인들은 만주에서 들어오는 조선인이면 의례껏 한번씩 성가시게 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지극히 태평이었다. 차가 남대 문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왜녀의 어린아이를 안고 플랫폼에 내렸다. 그리고 왜녀의 앞을 서서 순사와 형사 들이 눈을 번뜩이며 늘어서 있는 개찰구를 유유히 나갔다. 이렇게 마침내 서울로 들어온 그는 정거장 앞에서 왜녀 와 헤어지자 그 길로 이태원에 있는 아우 김준상(金俊相)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부인인 송씨와 오래간만에 상면하였다. 송씨는 그가 집을 나간 이후로 동생 집에 의탁하여 지내 고 있었다. 아내는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볼 사람을 보기 나 한 듯 놀라고 반가워하였다. 김익상도 역시 아내를 대 하는 것이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을 앞둔 그로서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속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자기가 자원한 중대 사명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폭탄과 권총이 들어 있는 가방은 그날 밤 베개삼아 베고 잤다.
다음날 1921년 9월 12일이었다. 이날 9시 조금 넘어 나이 20여 세 되어 보이는 전기회사 공원 하나가 한쪽 어깨에 수리기구를 넣은 가방을 메고 진고개에서 왜성대로 향하는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날 아침 총 독부를 폭파하러 나선 김익상 열사이다. 그는 고개를 다 올라가서 마침내 총독부 정문 앞에 다다랐다. 문 옆에는 무장한 헌병이 눈알을 번쩍이며 파수를 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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