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주간한국
20년 옥고 끝났지만 가족도 동지도 찾을 길 없어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23>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05 2023 07:36 PM
상해 황포탄(黃浦灘) 사건 <7·끝> 김익상 의사 고독한 최후 맞았을 듯
기자는 다시 (김익상의 처 송씨와 동생 김모가 경성에 체포되어 있었다) 김익상이가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물은즉 "글쎄요. 가족들이 자기와 함께 잡힌 것을 그가 이 감옥에 온 후에는 내가 알지도 못하였고 일러주지도 아니하였으니까 아마 모르겠지요. 하여간 이 감옥에 온 후로는 편지라고는 최모에게 하는 것밖에는 보지 못하였소. "
김익상의 공판은 그해 6월 30일 오전 9시 40분에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공개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9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상해에서 다나까 대장을 저격한 김익상은 25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마쓰오까 재 판장으로부터 무기징역의 판결선고가 있었다. (나가사끼 특전)
다시 한 달이 지난 10월말에는 일본군벌의 거두 다나까 대장을 상해 부두에서 암살코자 한 김익상의 공판은 30일 오후 3시 40분에 나가사끼 공소 원에서 개정되어 모리 재판장과 미요시(三好) 검사가 열석 하고 사실심리를 하였는데 김익상은 사실 전부를 시인하였 다. 열석하였던 미요시 검사가 일어나서 피고의 범행동기는 동정할 만한 점이 있으나 피고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을 위시하여 독립단이 따라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가벼운 형벌에 처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 극형에 처하여 달라고 구형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익상은 태연히 웃으며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 않겠다”고 공술하고 오후 5시 40분에 폐정하였다. (나가사끼 전보)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나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김익상의 항소공판은 6일 오후 1시에 나가사끼 공소원에서 개정되고 1심판결 무기징역을 취소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다시 5일이 지난 12일의 보도에는 “나가사끼 공소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상해에서 다나까 대장을 저격한 김익상은 상고기간인 9일 오 후 8시까지 상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나가사끼 지급전보)고 보도되었다.
이리하여 사형이 확정된 그는 오직 형의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소위 은사(恩赦)라는 것이 있어 종신징역으로 감형이 되고, 그후 구마모또 형무소에 서 복역중 1927년 2월에 또 한번 소위 은사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0년! 인생의 가장 유위한 시기를 옥중에서 보내고 30 대 청년이 어느덧 50대 중노인이 되어 김익상은 다시 이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20년 사이에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만주에는 어느 틈엔가 괴뢰정권이 섰고 중국은 강도 일본의 침략으로 도처에 참담한 전화를 입고 있었다. 옛 동지는 그 사이 많이들 죽고 없었다. 살아 있다 해도 그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이미 태평양전쟁이 한창으로 일본은 승전을 요란히 선전하고 있었다.
야사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만약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응당 동지들과 더불어 중국군대와 힘을 한권 역렬히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것으로 상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그의 짐작에 지나지 않았고, 그로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어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몹시 고독하였다. 21년만에 돌아와본 집에는 아내도 없었다. 아내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개가하여 집을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김익상은 아내를 원망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분명치 않다. 그의 생사를 우리는 아주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출옥·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형사 하나가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형사와 나간 채 김익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거취는 알 길이 없었다.
"그토록 20년간이나 옥고를 치르고 나왔건만 왜놈들은 그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않고 끌어갔나 보오. 아무래도 김익상동지는 그 악독한 왜놈들 손에 최후를 마친 것만 같군요."
8·15 후 김익상의 일을 회고하는 김약산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고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계속]
www.koreatimes.net/주간한국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