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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한인 최초의 캐나다 방문자
130년 전 미국서 상하이 가는 도중 밴쿠버 들러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Mar 15 2023 01:56 PM
미국 에모리대학 유학·영어능통한 선각자 11일 현대어 개정본 출판기념회 가져
◆윤경남(왼쪽)·민석홍(오른쪽)씨 부부가 지난 11일 센자일즈 킹스웨이 장로교회에서 열린 '우순소리'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우순소리는 윤치호 선생이 일기형식으로 쓴 글을 현대어로 옮긴 책이다.
조선의 선각자 윤치호가 지은 ‘우순소리’ 출판기념회가 지난 11일 센자일스 킹스웨이 장로교회(15 Lambeth Rd.)에서 열렸다.
본지 자매지 ‘주간한국’에 연재 중인 ‘우순소리’는 윤치호 선생이 일기형식으로 기술한 것을 그의 종손녀인 토론토 거주 윤경남씨가 남편 민석홍씨와 함께 현대어로 쓴 책이다.
◆토론토 교민 윤경남·민석홍씨 부부가 펴낸 우순소리의 표지디자인은 한호림씨가 맡았다. 윤경남씨는 윤치호 선생의 종손녀다.
- 출판기념회는 두 분 저자의 회혼(결혼 60주년) 축하연을 겸한 행사였다.
- 이날 유영식 전 토론토대학 교수는 윤치호와 캐나다 간의 관계를 설명,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유 교수 강연의 일부를 발췌한다.
[편집자 주] 글 중 '(한국어 p544, 영어 p540)'등으로 표시한 것은 유 교수 편저 '한국과 캐나다 나눈 역사' 중에서 한국어판과 영문판의 관계 페이지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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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선각자 윤치호는 16세가 되던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약 1년간 체류했다.
◆윤치호 선생(1865∼1945)
그는 요코하마에 가서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공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다가 1883년 미국의 초대 조선 주재 공사 풋트(Lucius Foote 1826-1913. 한국체류 1883-1885) 통역관으로 그해 5월13일 풋트와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
그는 풋트가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했다.
그가 입국한 지 10개월 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가 실패한다. 이때 그는 풋트 공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로 가는 길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김옥균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윤치호가 난생 처음으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한국어 p544, 영어 p540)
그는 상하이의 미국 남감리교 학교 중서학원(Anglo-American School)에 입학, 기독교 교리와 영어를 배우고 3년 후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내쉬빌에 있는 밴더빌트(Vanderbilt)와 조지아주 애틀랜타 소재 남감리교계 에모리(Emory)대학(당시 college)을 졸업했다.
1893년 윤치호는 상하이로 돌아가는 길에 캐나다를 만났다.
그해 10월 하순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밴쿠버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그는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조선박물관 등을 관람했다. 조선은 이 박람회에 사상 최초로 참가했다. 그는 캐나다관에서 본 호박 무게가 무려 486파운드, 둘레가 10피트 1인치, 높이가 3피트7인치라고 기록했다. 대수롭지 않게 보였으나 한국인 최초의 캐나다에 대한 기록이었다. (한국어 p545 영어 p540). 또한 그는 캐나다 땅을 밟은 최초의 한인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됐다.
그가 캐나다와 가진 관계를 연대적으로 보면 …..
첫 번째 : 1893년 10월14일 저녁 9시 도착
그랜빌(Granville)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당일 그의 일기는 “매우 불결하게 호텔을 운영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식탁에 놓인 수프, 설탕, 빵, 피클 등 음식물에 파리가 적어도 열 두어 마리 붙었다”고 적었다.
그는 다음날 오리엔탈호텔로 옮겼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캐나다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자는 잘 생긴 목사였다. 그는 설교 도중에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들을 지나치게 반복해 회중의 흥미를 감소시켰다.’ 예리한 통찰력이었다.
‘밴쿠버는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도시다. 기후는 온화하다. 산에는 하얀 눈이 쌓였고 정원에는 꽃들이 피었다.
밴쿠버 타운은 겨우 6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중국인, 일본인, 캐나다인, 미국인, 영국인 그리고 홍콩인들이 사용하는 조그마한 동전의 다양성에서 다민족사회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사실상, 거리는 중국인 세탁업자들 부류로 꽉 찼다. 오직 돈벌이에만 민감하다.
앤더슨 박사님을 방문했고 저녁 식사 후에는 그가 아는 친구들을 방문했다. 그들을 만났을 때 마치 고향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다. 그날 오후 거의 내내 도심지에게 약 1∼2마일 정도 떨어진 스텐리파크(Stanley Park)에서 지냈다. 이 공원은 공원 내에 조성된 한 개의 꽃밭과 작은 동물원을 제외하고는 공원 전체가 천연의 모습 그대로를 지녔고 열대식물이 무성하다. 공원 안 9마일을 관람하는 마차관광은 부자들에게는 인기 있는 관광코스다. 나는 공원에서 고사리 잎과 이끼 종류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채취했다.’
다음날 16일 오후 6시30분 그는 선박 Empress of India호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윤치호가 캐나다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2시간30분이 모자란 만 3일이었다. (p546 영어 p543)
두 번째 : 1896년 2차 캐나다 방문기 (p571 영어 p569)
학부협판의 관직을 가진 윤치호는 캐나다 1차 방문 3년이 되던 1896년에 캐나다를 두 번째 방문한다. 이번 경우는 고종이 민영환을 단장으로 5명의 특별사절단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보내는데 동행했다.
축하 사절단 일행은 캐나다를 대륙횡단한 최초의 조선인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총 9일10박 캐나다를 돌아보고 5월6일 저녁 10시30분에 뉴욕을 향하여 몬트리올을 떠났다. (p558 영어 p564)
3번째 : 윤치호는 1899년 1월7일 덕원 감리로 임명(35세)됐다.
19세기 한국에 온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기독교 선교사들은 약 1,500명 여명이다. 효율적 선교를 위해 각국 선교부는 조선땅을 분할했다.
이때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지정 받았다. 함남 원산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총책을 맡았다. 선교지 분할 과정에서 게일의 집이나 미국 북장로교재산 이양과정에서 감사였던 윤치호는 모든 문제를 원활하게 도왔다.
4번째: 윤치호의 환영사, 1930(p626 영어 p625)
캐나다 정계의 고위직자가 조선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일본 주재 캐나다 대사 허버트 말러(Herbert Marler)였다.
말러 대사가 내한했을 때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환영사를 했다.
“장관님, 어떤 의미에서, 귀하는 캐나다인으로서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외교장관입니다만 지난 40년 동안 대영국 연방국인 귀하의 나라 대표들께서 한국에 오셔서 한국 사람들과 지냈습니다. 귀하의 나라 아들 딸들이 시간과 노력을 바쳐 교육과 전도 및 자선사업을 위한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나라의 군주도 그들의 신임장에 서명하고 봉인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순응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유럽과 미국의 근대국가들이 그 꿈을 꾸기 수 세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내리셨던 명령입니다. 그들은 외교 용어로 쓴 메시지를 가져 오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땅에는 평화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는 친선의 정신을’이라는 보다 고귀하고 만인에게 보편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우리가 귀하와 귀하의 훌륭하신 부인을 생면(生面) 없는 이방인으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빚을 진 나라에서 온 친구로 환영한다고 제가 말하는 것을 귀하는 이해하실 것입니다. (후략)”
5번째: 1935년 에이비슨에 바친 고별사
의료 선교사 에이비슨이 한국을 떠난 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조선 사람의 은인이며 또한 훌륭한 친구를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의 친구인 당신과의 이별은 당신의 두 아들, 세브란스 의과대학 졸업생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을 통하여 혜택을 받은 어떤 사람도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무의미한 상투적인 말로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까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간단하게 저의 고별사를 마치겠습니다.”
6번째: 192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성경번역 출판비를 후원
7번째: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하디는 그의 딸 헬렌Helen을 양녀로 삼음.
결론: 이런 여러 가지 경우로 윤치호는 캐나다와 한국을 잇는 역할을 했다. 올해 2023년은 한국인 최초로 그가 캐나다 땅을 밟은 지 13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이를 기념, 좌옹 윤치호 평전을 캐나다 땅에서 출판하고 기념회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큰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역사적 심판으로 이 기사에서는 유보한다.
출판에 수고하신 저자들에게 감사와 축하를 드린다.
◆우순소리 출판기념회에서 강연한 유영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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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