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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寒食)과 개자추(介子推)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May 08 2023 01:03 PM
‘K-문화사랑방’의 봄학기 강좌에서 이 계절의 세시풍속으로 한식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한식과 청명, 그리고 개자추의 전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하게 들어주어서 반가웠다.
봄 가뭄과 봄비가 경계를 서로 엇바꾸는 계절이기도 한 지금, 봄비가 자주 내린다. 그러나 곳곳에 산불은 멈추지 않고 있다. 노란 레인코트를 선물 받은 후 모처럼 입고 나가면서 은근히 자주 입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서인가.
이곳저곳에 많이 일어나고 있는 산불들을 진압하는 데는 미흡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새싹들을 올려 미는 식물의 뿌리에게는 좋은 단비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하다. 어떻든 *한식과 *청명 사이인 지금이라도 비가 자주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식: 4월 5일이나 6일쯤이 되며, 민간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묘를 돌아본다. *청명: 24개 계절 중 하나로 한식과 하루 차이다.]
‘물 한식 불 단오’라는 말이 있다. 한식날 비가 오는 것과 단오(端午)에 햇볕이 쨍쨍한 것을 의미한다. 한식에 비가 오고 단오에 햇볕이 쨍쨍하면 풍년이 든다는 믿음에서 생긴 말이다. 곧 농사철이 시작되는데다 나무 심기 또한 알맞은 계절이므로 당연히 물이 넉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온 산과 들이 목이 마르다. 그래서 산불이 잦다. 기상학의 풀이로도 이해가 되지만, 봄 가뭄이란 말도 연관이 있어 통함을 알 수 있다.
韓食, 寒食, 韓式,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자가 맞는지 짚어보라고 했더니 寒食을 짚은 두어 명 외에는 고개를 갸웃둥하며 대답을 보류했다. 생활한자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외국에 나와 산지 오래다 보니 우리의 세시풍속에 멀어진 탓일 것이다. 세상이 전자시대로 바뀐 탓으로도 돌릴 수 있겠지만 이쯤은 기억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 기회에 ‘K-문화사랑방’의 회원들은 잘 이해하였을 것이다.
한식(寒食)의 유래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晋)나라에 문공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국난(國亂)이 발생하여 다른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그를 옹위하고 보호하는 신하무리들과 함께 낯선 고장을 떠돌아야 했다.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중큰일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모두가 배를 곯는 일이었다.
어느 날 굶주림으로 문공의 목숨이 다급해지자 신하 중의 한 사람인 개자추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요리를 만들어 문공을 살려냈다. 그 후 국란이 진정되고 평안해진 나라로 돌아온 문공이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문공이 많은 인물들을 등용해서 권력의 자리에 앉히고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개자추에게는 무심했다. 그의 헌신을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개자추는 섭섭했다. 낙심한 개자추는 세상을 버리기로 작심, 홀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후 어느 날, 문공이 순행 중에 궁문에 붙은 글귀를 보았다. ‘진나라 궁문에 유독 뱀 하나만이 원망에 잠겼다’였다. 그제야 문공은 개자추를 떠올렸다.
개자추의 은혜를 뒤늦게 깨달은 왕이 개자추를 불러들였다. 이미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개자추는 응하지 않았다. 몇 차례 불러도 왕명을 거역했다. 왕은 그를 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산 둘레에 불을 지르게 했다. 산을 불태워서라도 그를 불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온산이 다 타버린 후, 까맣게 불탄 버드나무 아래에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탄 재(炭)의 형상만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왕은 그의 넋을 달래는 재(齋)를 올리라 명했다.
불에 타 죽은 사람에게 뜨거운 음식을 올리는 것은 도리(道理)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찬 음식을 진설하게 했다. 그것이 한식(寒食)의 유래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지금의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주변의 일들도 생각해 볼만하다. 단순히 세시풍속이라고 해서 지나간 시절의 일로만 여기고 흘려보낼 일도 아니다.
봄철이니 얼마나 잘 탔을까. 어디 꼭 산불만인가.
멀리 떠나와 살고 있고,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벌초하는 일, 부모나 조상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나무 심는 일, 또한 그렇다. 물론 자연현상이 크게 작용하는 일이긴 하지만 때맞춰 내리는 봄비의 고마움이 비오는 날의 낭만으로 우리의 정서를 적셔준다는 생각으로만 그쳐서도 안되겠다.
뒤늦은 깨달음, 살다보면 뒤늦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일도 많다. 뒤늦게라도 알게 되고 깨닫게 됨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제 때 알아채고, 제 때 행하는 일이 쉬운 듯 하지만 말과 같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입는 은혜로움이나, 알게 모르게 잊어버려 배신이 되는 일은 없는지, K-문화사랑방 회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한 번쯤 새겨 들을만하다.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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