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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5.18 민주혁명을 다시 본다(2)
계엄군은 국군 맞는가? 인간이었나?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May 25 2023 03:44 PM
무차별 구타, 대검 찌르고 집단발포 시위 학생·남녀노소·임산부 등 구분 안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왜 하필 전남 광주에서였는가. 배경과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운동에서 무엇을 배웠나 등을 냉철하게 따져보는 시도가 이 시점에서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교훈을 안 받는다면 600여 희생자의 죽음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
초기
계엄령 이전 시위
1980년 5월15일 오후 4시 광주.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였다. 복학생 대표 정동녕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계엄령 철회 등 민주화 구호를 외쳤다.
학생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을 내리면 16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에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시위 방침을 시달했다.
5월17일 오후 9시, 신군부 압력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지배하는 보안사령부는 밤 10시께 야당지도자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체포, 감금했다. 계엄령 선포 2시간 전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국회를 점령, 국회기능을 중단시켰다.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됐고 곧 이어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언론보도 검열· 정치활동 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18일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광주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 진입했다. 이들은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출입자를 검문 검속했다.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 100여 명은 교문에서 출입을 막는 공수부대원에게 돌을 던졌다. 이로 인해 군측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부대원들은 학생구타로 대항했다.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고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참가자는 3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 해산을 시도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살상
신군부는 이날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 부대원들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이유없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학생들은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다. 계엄군은 곤봉과 총에 꽂은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상했다.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했다. 이제까지는 대학생 중심 시위였으나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 일반시민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합류했다. 이날 참가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이었다. 이에 대항, 계엄군의 진압은 더욱 가혹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행했다.
20일 시위대 규모는 엄청나게 증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막았다. 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할 뿐 아니라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마치 시위대가 침략해온 외국군인듯 그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항의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시위와 군의 진압상황을 '사상적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20일 밤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집단 발포하기 시작했다. 2군 사령부는 발포와 실탄 배분금지를 명령했으나 공수여단은 이를 무시, 다음날인 21일에는 집단발포를 계속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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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전체 댓글
kimberley ( qhyu**@hotmail.com )
May, 27, 10:07 AM누가 탱크를 몰고 광주 교도소로 쳐 들어갔나?
아직도 신원이 확인 되지않은 희생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엄군이 소지 하지도 쏘지도 않은 칼빙 소총에 맞아 죽은 다수의 시민 희생자는 누가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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