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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5.18 민주혁명을 다시 본다(5)
신군부 ‘K공작계획’ 수립, 언론 완전장악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Jun 09 2023 04:26 PM
검열 뿐 아니라 "미국이 지원한다" 기사날조 외신들 진실보도 "이런 참상은 처음본다"
◆1980년 5월 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이 광주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신군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막고 정계 인사들을 잡아가두어도 언론통제 없이는 정국안정과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보안사를 중심으로 'K공작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언론검열반'을 구성하고 전국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를 검열했다. 신군부 체제에 불리한 기사는 무조건 삭제했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여론을 조작했다. 복종하지 않는 언론은 폐간시킨다고 협박한 그들은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고갔다.
5월20일 주요 언론사들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 사실 보도의 자유를 요청했다. 조선일보는 21일 보도검열 전면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을 거부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쓰고 사표이유를 적은 전단지 2만 장을 인쇄해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이뿐 아니라 신군부는 전국의 중진 언론인을 초청, 광주실태를 취재토록 강제했다. 국방부 출입기자 등 언론인 32명과 경영자까지 49명을 ‘초청’, 24일 오전 6시30분부터 12시간 광주 일원에 보냈다. 그후 언론사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64명을 호텔에 초청 '시국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는 무려 4일에 걸쳐 계속됐다. 1시간 내기도 어려운 언론인들을 4일간이나 호텔에서 얼르고 달래면서 기를 죽였다.
미국은 5·18 당시에 한국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사태발발 수일 후 전모를 파악, "특전사의 과잉반응이 비극적 사태의 직접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광주 라디오 방송이 "미국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라고 허위 보도하는 것도 알았다.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의 즉시취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응하지 않았고 한국 언론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미국에서 전두환을 최고책임자로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이같은 왜곡 보도는 한국인의 반미 감정을 조장했다.
그후 32년이 지난 2012년 5월20일 광주 KBS와 광주 MBC 두 방송은 왜곡보도 반성문을 썼다.
'32년 만에 쓰는 반성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들은,
‘시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 때 당시 우리는 언론이 아니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진실을 알리지 못했던 저희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핵심들은 2016년 6월 월간 ‘신동아’ 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월권 행위는 없었다"면서 5·18에 대한 신군부 개입을 강력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11공수여단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1999년 고백수기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글을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는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또한 진압작전에서 피살된 군인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었다. 오인사격은 두 번 있었다. 24일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간에, 또 한 번은 육군 31사단과 충돌했다. 정작 시위대에게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다"고 증언했다.
외국 언론의 보도 - '학살이었다'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지의 필립 퐁스 기자는 5월27일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당시 상황은 학살이었다”고 증언했다.
AP통신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는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은 없었다. 만행은 7일 간 계속됐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진압군보다는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부각, 광주 소재 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고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다.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미국 선지의 서울 특파원은 "나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4인방 재판,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을 취재했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26일 단 하루만 광주에 있었지만 용감한 시민들의 모습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 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준 곳이었다"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현장에서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참상을 서방 세계에 가장 먼저 알린 언론인이다. "나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사건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식량 등 생활필수품이 부족했지만 매점매석한 사람은 없었다"고 강연했다.]
관련 판결
“성공한 쿠데타 처벌 못한다” 1심은 불기소
대법원은 판결 뒤집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한다”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 원 선고
노태우는 징역 17년 + 추징금 2,628억 원
검찰은 1995년 7월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이 불법으로 정권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으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그를 불기소 처분했다. 이에 따라 1심은 전씨의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995년 12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특별수사부를 설치,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의 12·12 쿠데타와 5·18 사태 재판에서 공소시효를 정지시켰다. 언제라도 수사하고 판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검찰은 5·18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23일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반란모의 참여 및 수행한 것을 인정, 유죄판결했다. 법정은 전두환에겐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에겐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했다. 이후 김대중 정권은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과자의 징역형은 사면하고 추징금만 내도록 특별조처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추징금을 미납하고 2021년 11월 사망했다. 그는 5.18에 대해 한마디도 사과한 적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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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전체 댓글
Billykim ( seoulloc**@gmail.com )
Jun, 10, 08:52 PM Reply광주 야기 고만하자.
수꼴틀딱졸나시러 ( johnnybestg**@gmail.com )
Jun, 11, 01:03 PM Reply왜 역사를 덮고 싶나보네. 그럼 용산 멧돼지, 돋보이고 싶은 학력 위조녀 이야기 할까? ㅉㅉ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