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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짧은 사람’의 글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Aug 08 2023 10:03 AM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교육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교사의 죽음, 대학교수인 야당 혁신 위원장의 설화, 장애 자녀를 둔 웹툰 작가의 교사에 대한 처신 등, 개별적인 사안이지만 셋 다 교육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서이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물론, 투표권을 두고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일대일로 표결해야 하냐’는 아들의 말에 엄마로서, 교육자로서 ‘왜 그게 되게 합리적이지 않고 맞지 않는 말’인지를 알아듣게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되게 합리적‘이라 말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 그리고 자폐 자녀를 둔 웹툰 작가의 교사에 대한 언행, 모두 교육과 관련 있다.
그중 자폐아 자녀를 둔 부모에 관한 일이 오래전에 지나간 내 인생의 한때를 기억하게 했다. 내 가족 중에서도 생각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위 시누였다.
큰 시누는 어렸을 때, 학교 사택의 우물에 빠져 경기를 심하게 한 후 생각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고 가족으로부터 들었다. 우물에 빠진 어렸던 큰 시누가 며칠간 깨어나지 않아 죽는다고 윗목에다 눕혀두었는데 살아났다고 했다.
내가 신혼 때부터 큰 시누와 살게 된 것은 새어머니께 누나를 맡길 수 없던, 외아들이었던 남편의 결정이었는데, 마흔 해도 더 전인 그때 만해도 복지시설이 지금 같지 않은 때여서 어쨌든 식구는 눈앞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미안하구나. 수많은 남의 자식은 가르쳤는데 내 자식은 안 되더구나.’
큰 시누를 모시고 살던 내게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시아버지께서 하신 말이었다.
외양이 반듯하고 살색이 고우시던 큰 시누는 실은 내게 몹시 조심스러운 맏시누였다. 그러나 시누는 ‘형님’이라 부르는 손 아래인 나를 ‘언니’라 불렀고, 그때부터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께서 왜 내 자식 교육은 안 되더라고 하셨던지를.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집에 이상한 사람이 산다는 소문이 나더니 급기야 이웃 몇 사람이 찾아와 시누를 어딘가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웃이 요구한 어딘가에 보내는 일은, 애초에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시누와 살기 십 년째 되던 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눈 감기까지 남편이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미안하다.’였다.
남편과는 겨우 십 년 살았고, 울타리 잃은 큰 시누와 나는 두 해를 더 함께 살다가 헤어졌다. 손아래 시누가 모셔갔다.
아픈 자식을 둔 웹툰 작가, 그 부모의 심정을 나는 안다.
내 남편이 말했었다, ‘누나 때문에 우리 식구는 마음껏 웃을 수도 없었다.’라고.
평생 수많은 남의 자식은 가르쳤어도 정신 아픈 딸 하나는 가르칠 수 없던 아버지의 고뇌의 무게가 온 식구들 마음에 해결될 수 없는 무거운 근심으로 그만큼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웹툰 작가, 그 젊은 부모인들 왜 아니 그러할까?
온전한 아이들 속에 아픈 자식을 보내는 그 심정을 어찌 모른다,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행여 내 자식이 학교에서 서러운 일이라도 겪을까 노심초사하다가, 녹음기도 붙여 보내며 과다한 관심을 보이다가, 급기야 변호사들을 만나고, 자식 가르치던 교사 제명까지 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그랬어도, 당신들이 한 그 일들은 그러함에도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음 아픈 자식 돌보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아는 당신들이 그 자식 돌보는 선생님에게 무례를 넘어 고소란 법적인 방법을 휘두른 것이다. 불법 도청하고, 선생님의 생명 줄 끊는 일에 두려움 없고, 법을 휘두를 데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 당신들의 그 언행이 경조부박했다. 자식 맡겨놓고 그 선생님을 함부로 대한 잘못, 너무 크다.
할 말 있다고, 어떻게 그 말 다 하고 사는가?
진정 자식을 위했다면 하고 싶던 그 말들은 서로 오래 참으며 선생님과 의논하듯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한 일 아니었는가?
그러니까 당신들은, 내 자식은 옳고 내 자식만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부모다.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일대일로 표결해야 하냐?’는 자식의 말에 ‘되게 합리적이지 않나?’라고 말한 그 여성의 사고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그런가, 뭔가 기본이 되던, 삶과 정신, 사회를 받치고 있던 든든하던 그 무엇이 자꾸 허물어지는 것 같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일러 그 여성의 아들은 투표권 주고 싶지 않은
‘미래가 짧은 분’이라 표현했을까?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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