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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양맡은 동생 홍선이를 만나다
남한 유격대원 가족이기 때문에 체포돼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Sep 08 2023 03:19 PM
월남 못한 처녀가 매일 밥 날라줘 유격대원 주홍길 수기(11)
◆6.25 당시 국군의 전투 모습.
사랑하는 동생이 나 때문에 잡혔구나. 나는 내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동생은 뒤숭숭한 고향 천내리를 떠나 군 소재지 문평 보건소에서 일했다. 길이나 공공장소를 소독, 전염병을 예방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6.25 때 유격대원으로 활약한 주홍길(토론토)씨.
하루는 내무서원들이 느닷없이 몰려와 열심히 일하는 그를 체포했다. 내가 남한 공작대원으로 침투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들은 동생이 나와 내통할 것을 의심한 것이다.
◆6.25 때 주홍길씨가 월남한 후 동생 홍선(사진)씨는 북한에 남아 가족을 돌봤다.
전투원 아닌 민간인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처형하고 … 이런 흉측한 일을 그들은 마음대로 결정했다. 인간 기본권은 조금도 존중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 아닌가.
내가 평양으로 압송되던 중 탈출했던 자임을 그들이 알면 동생을 더 혹독하게 다그쳤을 터인데 군청에서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조잡한 행정과 낙후된 통신 덕택이었다.
마음씨가 유난히 여린 동생이 내가 갇혔던 감방에서 고생한다는 것은 나를 퍽 괴롭게 했다. 나 혼자서라도 내무서에 잠입 공격해서 그를 구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장총 한 자루도, 수류탄 1개도 없지 않은가.
대신 내가 할 수 일이란 어선을 타고 30리 밖에 있는 아군들의 전초기지, 자유의 섬으로 탈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한 뼘만해도 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누님은 배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인민군 해안경비대는 영흥만 일대가 국군공작대의 침투 및 탈출지역임을 발견하고 밤낮 철통같이 경비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은 목선이라도 띄우려면 출항검사가 몹시 까다롭고 엄했으며 저녁이면 모든 배의 노가 따로 보관된다는 것.
1951년 5월31일 한반도전쟁이 거의 돌을 맞는 시점이었다. 밤중인데 누님 기침 신호가 들렸다. 평상시에는 없던 일이었다. 헛간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그 뒤에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눈을 의심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바로 동생이었다. 꿈에서도 걱정하고 기다리던 홍선이었다.
바로 한 해 전 50년 12월2일 나는 가족들을 그에게 맡기고 미군함정을 타고 월남했다. 그로부터 꼭 6개월만에 동생을 다시 만났으니 북한 땅에 표류한 유격대원에게만 주어진 특혜라할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고 그러다보니 밤을 샜다. 그는 나 때문에 감방생활을 했으면서도 그런 경험이나 불평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오히려 나의 안전한 탈출만 염려해주었다.
다음날 조용한 시골촌에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습이다”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폭탄 터지는 소리, 전투기의 기관총이 불을 뿜는 소리가 콩볶듯 했다. 내무서와 정치보위부가 폭격 당해 건물이 박살났다. 바로 이틀 전까지 동생이 잡혀있던 곳이어서 우리는 마음이 숙연했다. 동생은 용케 목숨을 건졌지만 여러 우익인사 동지들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내가 부산 영도기지를 떠난 지 어느덧 7주, 꽃향기가 숲을 짙게 덮은 유월이었다. 산야에는 녹음이 우거져 유격대원들이 침투 잠복하기 좋은 때다. 어쩌면 대원들이 내가 상륙했던 운림면 바로 그 산악지대에서 이미 활동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배를 타고 탈출하는 대신 그들을 하루 빨리 만나 작전에 합류하고 싶었다.
한편 누님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누님도 동의해서 거처를 문평읍 건너편 해안가의 외딴 집으로 옮겼다. 누님 시댁 쪽 친척이 되는 사람들의 집인데 그들은 나를 애타게 기다렸다. 월남하려고 원산항에 갔다가 배에 오르지 못해 맏아들 부부만 겨우 보내고 나머지 식구들은 주저앉은 가정이었다. 나는 월남에 성공한 그 맏아들 부부를 부산에서 만난 적이 있고 그 이야기를 누님에게 전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나를 직접 만나고 싶어했다.
나는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손가방 하나를 든 채 문평읍을 무사히 통과했다. 당시 북한사람들은 손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그 집 부모들은 아들 부부에 대한 소식을 묻고 또 물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되풀이 들어도 좀 더 듣고 싶어서 나에게 매달렸다. 전쟁이 소박한 시골사람들에게 준 불필요한 고통을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은 아는지?
나는 밤이 지나 새벽녘이 돼서야 헛간 은신처로 들어갔다. 해안가에는 집이 너댓 채 있었고 부근에는 솔밭이 울창했다.
어느 날 밤 나는 주인에게서 옥이라는 처녀를 소개받았다. 친척뻘이 되는 처녀의 가족 중 어머니와 남동생은 지난 겨울 해상으로 월남했고 아버지와 이 처녀만 뒤처졌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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