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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옥이의 시중을 받다
23살 총각은 잊혀진 남성성을 재발견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Sep 15 2023 03:37 PM
솔밭은 둘의 안식처, 그것도 잠깐 다시 피난길 위대한 헌신 -- 유격대원 주홍길(12)
◆아기는 부모를 모두 잃었는지 국군이 손을 잡아주고 있다. 오른쪽에는 보따리를 싸서 지게에 지고 피난길에 나선 주민.
처녀의 아버지는 행상으로 살았다. 그는 먼 지방을 다녀서 집에는 딸 옥이만 남았고 옥이는 이웃집 잔일을 거들어주면서 지냈다. 아무래도 숨어지내는 사람을 뒷바라지 해주기에는 옥이가 나을 것 같다고 해변가 집주인은 설명했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양가 집 규수 같은 정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얼굴이 고우면 어떻고 좀 떨어지면 어떤가. 나는 오랫만에 보는 여성 앞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갑자기 오랫동안 꺼졌던 남성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런 여자와 같이 편히 지내면 좋지 않을까? 생명을 내놓은 유격대원이 그래도 될까.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집 헛간에는 쌀독과 소금가마니, 농기구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고 그 중 한 구석이 내 차지였다. 밤을 새며 마루바닥을 뜯어내고 그 밑에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마루 위에는 쓰레기나 농기구를 올려놓으니 위장이 잘된 아지트가 됐다.
그날부터 옥이는 밥을 날라왔다. 가마니때기 같은데 밥그릇을 싸서 일하러 온 것처럼 헛간에 들어와서 마루송판을 두드리면 나는 두더지처럼 기어 나와 밥상을 받았다. 철장에 갇힌 짐승처럼 기다리다가 옥이를 보면 마음이 몹시 흐뭇했다. 대화할 인간, 특히 처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하루는 동생 홍선이가 낡은 라디오를 구해 왔다. 일본시대 쓰던 성냥갑 같이 생긴 구식이었다. 남한 방송은 전파가 약해 잘 안들렸는데 도쿄 일본 NHK 방송은 뚜렸했다. 그날부터 라디오는 나의 또다른 위안이요 소일거리였다. 라디오를 통해서 전투상황을 알았고 전선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아군은 속초, 간성을 탈환하고 고성까지 진격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함남 문천군도 곧 해방될 것으로 보였다. 조금만 더 참자. 옥이도, 라디오도, 둘도 없는 귀중한 생명줄이었고 이와 함께 연합군의 북진 상황도 용기와 인내를 주는 원천이었다.
옥이가 밥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으면 나는 고맙다고 인사한다. 숫기가 없어 매일 하는 말은 “고맙다”, “잘 먹었다”였다. 이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밥상을 받으면 돌아앉아서 먹었다. 옥이 앞에서 헐레벌떡 입에 넣는 모습을 보이기가 쑥스러웠다. 다 먹었을 때 신호를 보내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기다렸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다가와서 밥상을 들고 나갔다. 그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옥이는 내게 밥만 준 것이 아니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숙일 때마다 풍기는 젊은 여성의 체취와 머리칼 내음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셋. 한창 물이 오를 나이였다. 이성의 체취를 알기 시작한 것은 열아홉 때부터였지만 그때는 북한 탄광의 막장에서 석탄을 캐서 활당량을 채우느라고 젊음이니 낭만이니 하는 것들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여성을 정상적으로 대하거나 말 한마디를 제대로 건넬 능력이 없었다. 둘 다 정겨운 말 한마디를 덧붙이지 못한 쑥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빈그릇을 챙기던 옥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주선생님, 답답하시죠? 해변가에 나가보실래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초여름의 미풍이 살랑대고 밤하늘엔 별빛이 초롱초롱한 영흥만 갯가 바닷물에 발을 적셨다. 동해안 물은 언제나처럼 찼으나 신선했다.
논둑을 따라 가다가 말없이 컴컴한 솔밭으로 향했다. 이심전심이었다.
비릿한 바닷바람에 겹쳐 옥이의 머리내음이 오랫동안 들짐승같이 험악하게 살아온 나를 사로잡았다. 슬펐다. 왜 나는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나.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우리는 소나무 등치에 기대앉아 바닷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 후 그녀가 19살이고 원산 고급중학교(고교) 3학년생이었던 사실, 책을 많이 읽었고 더구나 음악에 대한 상식이 보통 이상임을 알았다.
어둠속에서 보는 그녀의 윤곽은 또렸했다. 기품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주선생님, 어떻게든지 자유를 찾으세요. 그래서 더 큰 일을 하세요.” 용기를 북돋아주는 고마운 말이었다.
자유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젊은 남녀는 숨어지내는 극한 상황 속에서 밤새도록 교감하면서 신비한 경험을 체험했다.
그후 솔밭은 우리의 피난처요, 별장이었다. 틈만 나면 솔밭 아늑한 숲속에 누워 우리는 끝없는 대화로 영적 교류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만 놔두지 않았다.
6.25 1주년을 맞을 때쯤 연합군은 치열하게 공습했다. 제공권은 제해권이 그러듯이 완전히 유엔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군 비행기는 원하면 언제, 어디라도 폭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래서 주민들이 술렁대며 피난준비를 시작했다. 인민위원회는 소개 명령을 내렸다. 옥이는 나에게 미숫가루를 넣어주고 넋을 잃은듯 하염없이 헛간에 서있었다.
옥이도 피난을 거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옥이의 등을 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잠깐만 가 있어. 곧 다시 만날거야. 옥이가 살아있어야 나도 살잖아. 곧 국군이 들어올거야.”
라디오에서 듣는 북한 지방방송은 ‘운림면 산악지대에 요즘 부쩍 반동분자들이 들끓고 있다’면서 계속해서 주의를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후속부대가 투입됐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1951년 7월7일 부슬비가 내리는 적막한 들판으로 나섰다. 허리춤에는 대검 1개가 꽂혀있었다. 정든 헛간, 아지트를 나설 때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여기를 떠나면 언제, 어디서 옥이를 만나나, 아니면 아예 생이별? 어디선가 옥이가 달려올 것 같은 환상 속에서 고향 천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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