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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길에서 경비원에게 발각되다
고향에 잠입, 부모와 동생 모두 만나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Sep 26 2023 03:54 PM
위대한 헌신 - 유격대원 주홍길 수기(13)
◆6.25 피난민들이 구호식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내가 숨은 문평군 교외에서 고향 천내리까지는 도로를 따라가면 60리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피해서 산길이나 논길로 걸어야 하니 100리 길은 걸어야 할 것이다. 대단히 먼 거리다. 좋다. 걸어보자. 나는 결심하고 밖으로 나섰다. 2개월 전에는 그들에게 체포되어 걷던 길이니 세월만 달라졌을 뿐이다. 운명의 장난인가, 행운인가. 나는 생각이 헷갈리면서 요상스런 길위에 있었다.
나는 처음 체포되었을 때 천내리 내무서 - 문평군 내무서 - 원산시 강원도 정치보위부로 이동할 때 이길을 남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길을 반대로 북쪽으로 걷는다. 내가 어릴 때 수없이 다니던 그 길이었다. 사실 옥이와 짧은 기간이었지만 꿈같이 지내다가 헤어진 것도 감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문천서 용담까지는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아 걷기 편한 철도를 선택했다. 너무 과신한 탓인가, 오래가지 않아서 철도 경비원들의 눈에 띄었다. 철두철미한 방어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 부리나케 걸어왔다. 속이 뜨끔했다. 어떻게 할까 순간 망설였다. 상대는 임기응변으로 둘러대도 통하지 않을 경비군들이었다. 나는 장기인 36계를 동원,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리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나고 총알이 날아왔다. 따발총이 아니라 M1소총처럼 한 방 쏘고 장전하는 구식 장총이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런 가운데 높이 5미터가 넘는 철교위에서 헛발을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영도 유격훈련소에서 배운 낙법이 나를 구해주었다. 그때가 밤이었기 때문에 경비군의 추격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용담역을 지났을 때는 새벽녘이었고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춥고 배고팠다. 신세가 처량했지만 울기보다는 다짐을 계속했다. “제발 기죽지마. 그러다가 병들면 끝장이야.”
정신력은 육체보다 강했던가. 이를 악물고 의지의 힘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몸에게 병마는 접근하지 못했다.
마침내 마을 앞산에 닿았고 고향 천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은 동생과 자주 왔던 곳이고 누님과 어머니가 산나물 캐러 종종 올라온 산이다. 아련한 추억에 잠시 감상에 빠졌다. 아침 햇살이 퍼지는 숲속에서 들짐승처럼 산딸기를 따먹었다. 스물세살 청년의 공복이 산딸기로 채워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밖에 도리가 없었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천내리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고향 천내리 - 19살 때 애국단사건에 연루되어 북한인민군 포승줄에 묶였던 곳이고 그 때문에 3년의 형기를 탄광에서 마치고 돌아와 산속에 숨었던 곳이다. 그뿐 아니라 국군이 북상한 후에는 자유를 찾았다는 생각에서 두달 간 치안대원을 이끌며 적색분자들을 색출하던 곳.
계절은 7월, 한여름이었다. 밤이면 근로장으로 강제동원됐던 주민들이 넓은 앞쪽 강물에서 목욕하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 나도 그 강물에 풍덩 빠져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자. 물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쳐보았다. 그러나 곧 허기가 노크, 정신은 맑았으나 머리가 어찔했다. 그래도 목욕한 몸으로 부모님을 만나는건 얼마나 다행인가. 웃저고리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앞으로 다가갔다.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가슴에서 고동쳤다.
대문 쪽을 피하고 뒷문을 넘었다. 집안은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주인님 계십니까?” 용기를 내서 저음으로 불러보았다.
“누구요?”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늙으셨지만 여전히 패기 있는 아버지 음성이었다. 나는 즉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지! 홍길입니다.” 우선 큰 절부터 드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홍길아 네가 맞느냐. 네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니? 이게 어쩐 일이냐.” 아버지는 믿어지지 않았다. “네가 홍길이냐?”
아버지는 영흥지방의 친척집에 숨어 계시다가 밤을 이용해서 여름옷 몇 가지를 챙기려 오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북쪽 영흥에서 내려오셨고 나는 남쪽 문평에서 올라갔다. 아버지는 반동의 자식을 둔 불순불자로 몰려 숨어 지내셨고 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고향 가족을 찾아왔다가 운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원래 이 집은 고모집인데 그들은 폭격을 피해 강건너로 피난갔다. 해방 전부터 우리가 살던 집은 폭격으로 타버려 없어졌다.
부모는 숨어 지내는 신세고 큰 아들은 적지가 된 고향 산과 들을 들짐승처럼 헤맨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보건소에서 일하다가 유격대원 형 때문에 늘 감시를 받는다. 이념과 사상이 초래한 콩가루 집안이다.
어머니는 한밤중이 되어 집에 오셨다. 어머니는 연신 우시면서 “장하다. 장해”라면서 내게 용기를 주셨다. 누구도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다음날 나는 숨어야 할 곳을 당장 찾아야 했다. 아무리 봐도 집안의 천장 외에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도배지가 숭숭 뚫려 속이 보이긴 해도 안쪽 깊숙이 대들보를 이용해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낮에는 길에 사람이 많아서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저녁이 되자 뜻밖에 고모와 고모부가 들렀다. 고모부는 누이 남편, 즉 매형처럼 열성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나는 천장 위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두 사람은 옷만 주섬주섬 싸가지고 곧 나가버렸다. 그후 소독작업반의 동생이 인근 소독을 끝내고 집에 들렀다. 어머니가 내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나는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한시가 아쉬웠다. 짧은 여름밤 1가족 4명이 모였지만 반가움이나 환희보다 두려움과 살길이 모두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머니는 가슴이 메어 자주 눈물을 닦으셨고 동생 홍선이도 자주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모든 불행이 누구 때문인가. 전혀 불필요한 전쟁 때문이 아닌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지배자들에게는 우리 같은 말단 국민의 행복과 안녕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동생은 "휴전회담이 곧 열릴 것이며 요즘 근처 산지대에서는 밤에 산사람들이 내려와 양식을 훔쳐가거나 소를 끌고 간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우리 후속부대가 도착했다는 이야기이므로 퍽 고무적이었다. 그렇다면 고생도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네 식구가 이야기로 밤을 지내운 동안 밖에는 동이 텄다. 아버지는 옷보따리를 챙기면서 “홍길아, 어떻게든지 살아나가라”라고 당부했다. 나도 목이 메어 겨우 “아버지도요…”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부자가 지상에서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초라한 옷보따리를 들고 여명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 뒷모습이 내가 부친을 이땅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아버지는 영흥지방을 헤매시다가 폭격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와 동생은 벽장 마루밑을 파내는 공사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공간이었지만 다행히 그때 북한의 전기사정은 좋아서 땅굴에 전깃불을 주야로 밝힐 수 있었다. 동생은 작은 선풍기와 지난번처럼 작은 라디오를 구해왔다. 그때부터 나는 낮에는 독서로, 밤에는 라디오로 전황을 듣는데 시간을 소비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그제야 살 맛이 났고 곧 구제된다는 희망을 품었다. 라디오는 도쿄의 NHK방송과 유엔군 방송을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옥수수, 수수, 조, 감자 같은 간식을 수시로 넣어 주셨다. 동네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구걸하다시피 모은 음식이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머니가 못 할 일은 없었다. 마치 문평에서 옥이가 나를 희생적으로 보살펴 주었듯이 이번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듬뿍 느꼈다.
그때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나와 같이 침투했다가 송전반도에서 헤어졌던 원국건 동지가 처갓집에 찾아갔다가 냉대를 받고 돌아섰다는 이야기였다. 냉대든 박대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잘 만 하면 살아서 만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다.
또 한 가지는 영도부대 김모 동지가 우리 뒤를 이어 후속부대로 투입됐다가 쫓기는 신세가 됐는데 친형 집에 잠복했으나 가족들이 배척해서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 북한의 행정질서나 통신시설 미비로 우리 요원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산으로 도피했고 특히 내가 평양 압송 도중 탈출했다는 사실을 천내읍 내무서는 일절 몰랐다는 것은 내 생명을 위해선 큰 도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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