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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지붕’과 ‘백조의 성’(유럽 알프스 여행기 2)
손영호(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5 2023 04:13 PM
▲ 인스브루크 구시가지에 있는 황금지붕
인스브루크(Innsbruck)는 인구 13만 여의 작은 도시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잘츠부르크 다음의 일곱 번째 큰 도시로 독일어 지명은 '인(Inn) 강의 다리(bruck)'라는 뜻이다. 이 작은 도시에서 동계 올림픽을 1964년, 1976년 두 번이나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다.
인스브루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구시가지 헤르초크 프리드리히 거리에 있는 황금지붕(Goldenes Dachl, Golden Roof)이다.
원래 이 건물은 티롤 군주의 거주지로 15세기 초 프리드리히 4세 대공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94년 밀라노 공작의 딸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Bianca Maria Sforza)와의 세 번째(실제는 두 번째) 결혼을 기념해 이 발코니 지붕에 불도금한 2,657개의 동판 타일을 덮으며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황금지붕'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황제는 1477년 결혼했으나 1482년 낙마사고로 죽은 첫 번째 부인 부르고뉴 마리(Mary of Burgundy)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황금지붕에 조각된 테라스 장식에는 비앙카뿐 아니라 마리도 함께 조각돼 있다. 결혼생활 내내 비앙카는 마리와 비교되었고, 결국 황금 지붕이 완공된 1500년에 둘은 별거에 들어갔다. 비앙카는 10년 뒤인 1510년 인스브루크에서 38세로 죽었다.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비앙카 황후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결혼 전인 1493년에 결혼 기념 여행으로 방문했던 퓌센(Fusse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는 1498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별거 선고를 받고 눈물을 흘렸던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천당과 지옥을 오간 곳이 퓌센이었다고 하겠다.
며칠 후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퓌센(Fuessen)을 답사했다. 퓌센은 매년 13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즉 '신(新·neu) 백조(白鳥·schwan) 석성(石城·stein)'이 있는 곳이다. 백조의 성은 바이에른의 제2대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가 1869~1892년 사이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그는 이 성의 완성을 못 보고 사망했다.
여기서 'neu'가 붙은 이유는 아마 12세기에 지어진 호엔슈방가우(Hohenschwangau) 성의 옛이름이 'Schwanstein'이었고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차별화 하기 위해 'neu'가 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니까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황후가 방문했던 시기엔 아마도 호엔슈방가우 성에 머물렀지 싶다.
▲호엔슈방가우(Hohenschwangau) 성
1864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는 15세 때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로엔그린(Lohengrin)'을 보고 오페라에 나오는 백조의 성을 짓겠다고 결심하고,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 등을 참작하여 지은 성이 '신 백조의 성'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르트부르크 성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신약성서를 고지(高地) 독일어로 번역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22년 9월의 일이다.
비록 루트비히 2세는 광인왕(狂人王)으로 불리었지만 바그너 입장에서는 구세주였다. 바그너의 걸작으로 꼽히는 '니벨룽의 반지'는 스위스 망명 중이었던 1848년부터 1874년까지 26년에 걸쳐 혼자서 대본을 쓰고 작곡한 대작이다. 나흘 동안 18시간짜리 공연이다 보니 마땅한 공연장소가 없어 1874년 1월, 루트비히 2세가 10만 탈러(Thaler)를 주어 바바리아 북부 도시인 바이로이트(Bayreuth)에 새 극장을 짓게 된다.
▲ 독일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그리고 이왕 짓는 김에 바그너 식구가 편안히 거주할 반프리트 빌라(Villa Wahnfried,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는 뜻)도 같이 짓고 드디어 1876년 8월에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다.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공연되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세계적 음악페스티벌이다. 여담으로 잘츠부르크와 잘츠카머구트를 안내하던 석명호 씨는 안동 출신으로 전도사로 와서 종교음악을 공부하다 현지에 정착했는데, 바그너 음악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았다.
루트비히 2세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사촌이자 그의 5촌 종고모(從姑母)였던 조피 샤를로테(Duchess Sophie Charlotte, 1847~1897)와 1867년 1월 약혼했지만, 동성애자였던 그는 10월에 파혼했다. 이 약혼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부인이자 조피의 친언니인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telsbach)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루트비히 2세. 1882년 <자료: 위키피디아>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루트비히 2세는 1886년 6월10일,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고, 사흘 뒤인 6월13일 오후 6시 이후쯤 근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주치의와 함께 의문사 했다. 나이 불과 40세 때였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그의 장례식 때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1914년에 그린 노이슈반슈타인 성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데,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잘 그려 독재자 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준다.
▲아돌프 히틀러가 1914년에 그린 노이슈반슈타인 성 <자료: 위키피디아>
손영호
손영호(토론토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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