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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리 전투서 대승...적 220명 사살
인민군은 유격대기지 활기봉 완전제거 작전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Oct 20 2023 04:00 PM
위대한 헌신 - 주홍길 유격대원 수기(16)
◆6.25 당시 북한군은 함경북도 활기봉(지도에서 빨간색 부분)의 유격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중장리 전투
1951년 9월에 접어들었을 때 인민군은 함경북도 활기봉 유격부대를 본격 토벌, 후환을 뿌리 뽑기로 작전을 세웠다. 마치 나치독일이 서방 연합군에 대처하기 위해서 동쪽의 러시아를 먼저 잠재워야 한다고 생각한 전략과 같다.
부산 영도 유격부대 본부는 9월16일 3차 보충대 21명, 다음날에는 4차 35명을 활기봉에 낙하시켜 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활기봉은 함북 갑산, 명천, 성진군의 중앙에 있는 높은 산이다. 첩첩산중의 깊은 산골을 의미하던 ‘삼수 갑산’이라던 그 갑산군에 가까왔다. 산골중의 산골이어서 이조시대에는 귀양지로 쓰였다. 그러므로 유격부대 기지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9월20일 유격대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아군을 돕는 노동당 세포위원장에 의하면 인민군 대대병력이 활기봉 유격대 완전토벌을 위해서 중장리의 중장인민학교에 집결했다는 소식이었다. 사령관으로 갓 임명된 지용수 동지는 영도본부에 즉시 타전, 공중지원을 요청하고 250명 대원을 갑산, 혜산, 단천의 3개 지구대로 편성해서 중장리를 향해 출발했다. 기지는 1개 경비소대가 지켰다.
23일 부대는 중장리를 20리쯤 앞에 둔 지점에서 행군을 중지하고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경이었다.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더니 폭격기 4대가 나타나 폭격을 시작했다. 폭탄의 뭉게구름이 온 중장리를 덮었다.
야음이 깃들자 대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갖고 행군을 재개, 24일 새벽 4시께 중장리에 도착하면서 마을을 완전 포위했다. 중장리는 50호 정도를 가진 작은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먼동이 트면서 전날 폭격으로 끔직하게 파괴된 학교와 부서진 농가가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6시, 학교의 기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포위한 우리 부대원들에게까지 들렸다.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호각소리를 듣고 잠자다가 일어난 인민군 약 300명이 폭격당한 학교안에서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그들이 아침 체조를 하려고 웃옷을 벗는 순간 지 사령관은 공격신호탄을 하늘 높이 발사했다.
곧 박격포탄 1개가 명중, 그들 가운데서 터지고 3면의 고지에 포진했던 우리 대원들은 경기관총, BAR소총 등 무기를 총동원해서 집중사격을 가했다. 운동장은 삽시간에 쓰러지는 자, 뛰는 자, 비명을 지르는 자로 수라장이 되고 타나 남은 학교건물은 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근처 농가에서는 놀란 소, 개, 돼지들이 이리저리 뛰어 나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적들은 응사하기 시작하고 도주병들이 다시 합세, 반격을 시도했다. 막대한 희생을 당한 적들 중 일부는 우리의 갑산 및 혜산 지구대 후면으로 우회 역습했다.
수적으로 압도 당한 갑산·혜산 두 지구대는 일단 후퇴할 때 본부 부대와 단천 부대가 돌격전을 감행하면서 역공에 성공했다. 전투는 아침 10시가 돼서야 끝났다. 인민군들은 많은 시체와 부상병들을 남겨 놓은 채 도주했다.
이날 전투에서 우리 대원들은 적 220명을 사살했다. 식량창고를 접수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대원도 5명이 전사, 가슴을 치게 했다. 부대는 오전 11시께 중장리를 출발, 오후 1시께 감자밭이 있는 공지에 도착했다. 승리의 기쁨에 피로와 허기를 잊었던 대원들은 위험이 사라지자 갑자기 심한 피로와 공복감을 느꼈다. 전날 밤 한 잠도 못 잤는데 아침과 점심마저 굶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농사꾼들이 추수하고 남겨둔 감자를 날로 씹으면서 활기봉 기지로 향했다.
일전 한푼 봉급이 없고 군번도 소속도 분명치 않고 오로지 반공 의욕과 충성심만으로 무장한 대원들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전투에서 승리한 것, 그것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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