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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사무직 넘쳐나며 '가짜노동' 늘었다
직원 감시·통제보다 신뢰·여유를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27 2024 11:25 AM
‘가짜노동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인터뷰 일이 즐거워야 ‘혁신적 사고’ 나와 노동시간 더 줄여야 생산성 개선
‘인간은 재량시간이 더 확보될 때마다 자신을 계속 분주하게 만들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더 추상적이고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의 일을 하느라 더 바빠졌다.’ (책 ‘가짜노동’ 발췌)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기술 발전을 근거로 “2030년까지 인간의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 ‘약속의 시간’을 6년 앞둔 지금, 선진국 문턱을 넘은 한국은 여전히 주 40시간 노동을 하고 있으며, 일 짧게 하기로 유명한 프랑스는 24년 동안 주당 노동시간을 ‘35시간’에서 줄이지 못한다.
기술은 발전했는데, 왜 인간은 계속 ‘노동의 굴레’를 이리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를 명쾌하게 제시한 책이 바로 덴마크의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 함께 쓴 ‘가짜노동’이다. 두 사람은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무의미한 업무인 가짜노동을 하느라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2022년 번역 출간돼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의 공저자, 인류학자 뇌르마르크를 한국일보가 화상으로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실제 업무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대한 고민, 효과성에 대한 고민이 한국 사회에 없었던 것 같다”며 “가짜노동을 없애기 위해선 과도한 교육열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본보가 뇌르마르크와 나눈 일문일답.
지난해 12월 책 ‘가짜노동’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가 본보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서현 기자
-가짜노동이란 개념이 이 시대에 호소력을 갖게 된 배경은 뭔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내 일이 의미가 없다’는 나름대로의 추정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자신이 항상 최적화되고 효율적인 일을 하면서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 내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거다. 가짜노동은 이런 사람들을 연결시켜줬다. 사람들이 책을 통해 ‘내가 잘못된 줄 알고 있었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서로 공감을 얻은 것 같다.”
-자기 업무가 가짜노동인지를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핵심은 지루한 일과 가짜노동을 구분하는 거다. 가짜노동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잠시 무시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매달 파리에 있는 본부로 보고서를 보냈어야 했는데, 5년간 이 일을 멈췄음에도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가짜노동을 줄여 효과를 본 사례는 있나.
“최근에 독일에서 한 베이커리 사례를 봤다. 직원 5,000명이 종사하는 사업체인데, 여기서 직원들 스스로가 가짜노동을 파악하고 식별을 하게 만들었다. 이후 한 집단에서는 계속해서 가짜노동을 하도록 하고, 다른 한 집단의 직원들에게는 없애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가짜노동을 없앤 집단이 생산성이나 판매 지표의 차원에서 5%가량의 개선을 이뤄냈다.”
-한국은 효율성에 목숨을 거는 나라다. 그럼에도 왜 한국에 가짜노동이 이렇게 많을까.
“효율성과 효과성을 구분해야 한다. 한국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 집중했을 수 있지만, 효과성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효율성’을 중시하는 문화는 가짜노동을 만들어 낸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척하거나, 쓸데없는 회의 일정으로 캘린더를 채운다. 효율성의 상징처럼 보이는 일들을 많이 채워놓으면, 되게 멋지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최고 수준이다. 책에는 과도한 교육이 가짜노동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혔더라.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전공분야가 점점 세분화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이런 세부전공을 공부한 사람들을 고용하기 위해 사사로운 직책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제품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제품을 위한 TF팀을 만드는 데 신경 쓰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소비자나 고객을 실제 돕기보다는 ‘돕기 위한 프로세스’를 개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실제 가치를 창출하는 일보다 새로운 미팅을 하고 관리를 하고 전략을 짜는 식의 가짜노동이 늘어난 거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교육열을 줄일 방법이 있을까.
“태도나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할 거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전 세계가 사무직이나 관리직 아니면 학문직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이를 멈춰 세울 필요가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필요로 하는 업무가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단적으로 덴마크에서는 사무직이 넘쳐나는 반면, 풍차를 만들거나 파이프를 수리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노동을 할 사람이 부족한 상태다. 집수리를 하려면 두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기업들은 ‘생산성이 가짜노동을 하는 사무직이 아닌 직접 노동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계를 고쳐나가야 한다.”
-한국에선 가짜노동의 심각성을 느끼는 정도가 세대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본보 27일 자 5면). 젊은 층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데.
“젊은 층은 본인들의 노동력이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젊은 세대가 가지는 노동자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이것이 권력임을 알고 계속해서 기성세대에 질문을 해야 한다. 기성세대도 젊은이들의 질문에 짜증을 낼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지닐수록 더 빠른 변화가 가능하다.”
-책에서 부하직원을 강압적으로 감시하는 것보다 신뢰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방법 아닌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신뢰’의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보다 관리자들이 가짜노동의 폐해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리직이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직접적으로 노동자에게 의미 있는 일들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가치 창출에 집중할 수 있다. 또 최근 연구를 통해, 직원들에게 여유를 주면 더 많은 혁신이 이뤄진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도 그렇고 전 세계가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가 없이, 너무 많은 구속과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혁신의 결여로 이어진다.”
-한국에선 저성장에 대한 우려가 많다. 가짜노동을 떨치려는 노력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까.
“당연하다. 가짜노동을 척결하고 나면 우리가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을 즐겁다고 생각할 때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사고가 나올 수 있다. 더 많은 동기부여는 덤이다.”
-가짜노동을 강조하면, 누군가는 ‘사람을 줄이고 일자리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인력 감축이 항상 답은 아니다.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게 더 중요하다. 많은 기업에서 주당 노동시간을 줄이니 가짜노동이 줄고 효율성이 개선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주당 근무시간이 25시간을 넘으면 노동자의 인지 능력이 떨어져 능률이 더 떨어진다고 한다. 덴마크에서도 많은 기업이 주 4일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생산성이 훨씬 더 개선됐다.”
이서현·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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