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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震檀學會)와 진단시(震檀詩)
권천학 |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 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
- Mar 04 2024 01:58 PM
언어학자 김수경(金壽卿)
봄! 삼일절! 3월 들어 첫날, 의미 깊은 책 한 권을 받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이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金壽卿)'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발레 그림 시리즈 중의 ‘Dancers Rehearsing’(무용수 리허설)이 프린트된 카드가 책갈피에 끼어있었다. 그 카드에 적힌 예의 바른 글줄에서 출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정성과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사회학과 교수인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가 일본의 경도(京都)인 문서원(人文書院)에서 2021년에 출판한 '北に渡った言語學者金壽卿'을 일본 도시샤대학 글로벌지역문화학부의 고영진 교수와 중앙대학교의 중앙사학연구소 부교수인 임경화 교수가 우리말로 옮겨 출판한 책이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金壽卿). 연합뉴스
2013년 도시샤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심포지엄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조명, ‘北に渡つた言語學者金壽卿の再照明’』을 계기로 김수경에 관한 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고, 이어서 11월에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주최로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과 ‘조선어학회’의 재조명』이라는 타이틀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는데, ‘식민과 냉전의 틀에 긴박 되어있던 조선어학/한국어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목표’였다고 밝히고 있다.
책을 받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와 진단시동인(震檀詩同人)이 오버랩 되었다. 나와 김수경 선생의 둘째 딸은 친구 사이다. 나는 진단시동인으로 활동했고, 그 친구의 아버지는 진단학회의 회원이었다. 토론토에 살면서 알게 된 그 친구는 속 깊고 침착한 성품이었다. 문화에 대한 인식도 높은 편 이었고, 음악에 조예도 깊어, 가끔 나와 우리 가족을 콘서트에 초대도 하고 안내도 해주었다. 나는 그 방면에 대해서 부족하지만 나름 성향이 비슷해서 그 친구와 교우가 깊어질 수 있었다.
그런 그 친구가 언제인가 자신의 아버지가 진단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김수경임을, 비밀을 이야기하듯 털어놓았다. 진단학회 회원? 진단시동인으로 활동했던 나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진단학회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회원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듣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묘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진단시 동인이었던 내가 토론토에 살면서 같은 토론토에 사는, 진단학회의 회원이었던 언어학자 김수경 선생의 둘째 딸과 친구가 되다니. 이렇게도 연결이 되는구나 하고.
나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에 해체되기까지 진단시(震檀詩)동인으로 활동했다. 매년 ‘진단시’ 동인지를 출판하였는데, 진단시동인은 일반 주제와 함께 역사적 모티브를 주제로 다루면서, 동인시대의 중심축으로 인정받았고, 학계에서도 비중 있는 동인으로 평가받아 거론되곤 했다. 그 와중에 ‘진단시’라는 이름이, 문학에 대한 혹은 시에 대한 진단(診斷)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표지에 ‘震檀詩’라고 쓰기 시작했고,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정신을 잇고 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진단학회는 1934년, 한국인 스스로 한국문화의 개척, 발전, 향상을 꾀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학술단체이다. 일제강점기의 진단학회와 현대의 진단시동인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정신적인 면에서 한국 정신의 각별한 맥락의 문학 활동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역사의식 전래(傳來)라고 할 수 있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들려준 그간의 경위에서,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아버지와의 재회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음도 알게 되었다. 이리저리 연줄을 이용하여 수소문했고, 재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내 친구는 일본에도 가고, 북한에도 가서 아버지를 만났고, 베이징 학회에서도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면서 보여준 사진들이 이번 책에 수록 되어있었다.
민족의 전쟁사만이 아니라, 남북으로 갈린 역사의 통증을 그대로 앓는 가족 사이기도 했다. 그 친구의 어머니, 그러니까 선생의 아내인 이남재 님은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 매우 강단이 있는 분이셨다. 노령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그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이층의 어머니 방에 들러 인사를 하곤 했는데, 매우 깔끔하고 정갈한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 몇 해 전 그 친구는 선생의 일본출판기념회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김남재 님은 노환으로 시달리다가 2019년에 별세하셨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번 책에서 선생을 천재 언어학자로 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의 확립과, 지키려는 노력, 한글을 보존하는 기틀과 학문적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언어학자로서의 지식기반을 구축해 온 그의 업적과 생애를 낱낱이 수집, 기록한 개인사이면서 한국어사(韓國語史)였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경 선생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동시에 언어를 다루는 학문과 문학을 하는 자세와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다시금 새겨보게 된다.♠
권천학 | 문화컨설턴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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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