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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무궁화

권천학 |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Updated -- Aug 18 2024 09:13 PM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Aug 17 2024 08:16 AM


나와 무궁화의 대화가 시작된 것은 새집으로 이사 와 첫 밤을 보내고 난 바로 그 첫 새벽부터였습니다. 새집의 설렘으로 일찍 잠이 깨었습니다. 모두들 고단함으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각이어서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 사이를 헤집고 뒷마당 쪽 문을 여는 순간, 희붐한 새벽공간을 뚫고 눈을 찌르듯 박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 무궁화! 
새하얀 꽃잎에 새빨간 꽃심. 색깔이 유난히 선연해서 눈이 부시다 못해 마음까지 부셨습니다.
‘백의민족’이 떠오르며 저릿했습니다. 이사하느라고 분주했던 전날까지도 봉오리로 있어 잠잠했는데, 마치 우리의 이사를 축하해주듯, 우리와의 만남을 반기는 듯, 밤사이 첫 꽃을 피워 올린 새하얀 무궁화! 포름하게 바랜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오신 선조(先祖)할아버지 같았습니다.  
아홉 송이였습니다. 

타국생활이 벌써 여러 해가 되고 보니 이곳의 생활환경에 어느 정도는 적응되었지만 아직도 어딘가 모르게 물에 떠도는 기름 같습니다. 먹는 것도 생활방식도 어중간합니다. 완전 한국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캐나다식도 아닙니다. 거기다 아직 영어도 서툽니다. 나름대로의 서툰 이유가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우리 집에서 ‘한국어 담당’입니다. 자라는 어린것들에게 한국을, 한국사람임을 가르치려는 의도에서 한국말로만 말하고,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손자손녀가 옹알이를 할 때부터 한국말로 응답하고 가르쳤습니다. 육아방법도 놀이도 한국식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우기는커녕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영어는 뒷전이었습니다. 어디 한국말뿐이겠습니까. 한국의 얼, 그것을 심는 일이었지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무궁화 앞으로 다가서는데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이고, 나는 대한민국 꽃이야!’ 하는 무궁화의 귀엣말이 들립니다. 
“그래, 나도 무궁화야” 하고 소리 내어 대답했습니다. 

 

soyoung-han-ujz4xsmwacu-unsplash.jpg

언스플래쉬.

 

두어해 전부터 단독주택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을 때 물망에 오른 여러 집들을 둘러보았는데, 그중 마음에 들었던 집이 바로 이집이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고 다시 둘러보러 왔을 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뒷마당 반쪽을 갈아 만든 화단 가운데에 덩그마니 서 있는 무궁화였습니다. 
무궁화!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어색했습니다. 휑뎅그렁한 화단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서있는 나무가 하필이면 무궁화라니. 이름 모르는 키 작은 서양종 식물 서너 포기가 드문드문, 무성한 잡초와 섞인 떼 풀 사이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전 주인이 화단을 돌보지 않았음이 역력했고, 그나마 화단 가운데에 불쑥 무궁화를 심은 것도, 집을 팔기 위해서 급하게 조경했음이 짐작되었습니다. 그러자니 나무 둘레에 거름을 듬뿍 넣었을 것이 짐작되었습니다. 덕분인지 무궁화가 건강했습니다. 허리쯤 닿는 키에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빽빽하게 암팡졌습니다. 용케도 무궁화였다니, 이상했던 생각은 이내 고마운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무궁화가 흔치않았습니다. 시골집 마당이든 울타리든 접시꽃과 봉숭아는 흔해도 무궁화는 드물었습니다. 무궁화는 진딧물이 많이 생기고 오갈이 잘 드는 나무로 인식되었고, 하필이면 그런 꽃을 우리나라꽃으로 삼았을까? 이상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꽃이라서 토양이 좋지 않고 응달진 곳이나 진창에 무궁화를 심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해놓고 ‘진딧물이 잘 생기고 오갈이 잘 드는 병약한 품종의 나무’라고 누명을 씌우며 보기 싫다고 뽑아내버리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의 악랄함에 속이 떨렸었습니다. 어쩌다 무궁화 한 그루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린 마음에 억울하게 칼을 쓰고 매를 맞고 옥살이를 하는 ‘춘향’을 떠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끝내 사랑을 이룬 춘향이! 

정작 선조들이 무궁화를 국화로 삼은 뜻을 짚어낸 것은 외국에서였습니다. 피고 피고 또 피고... 어디든 뿌리내리는 강인함, 무궁화의 기개를 알았던 것입니다. 
유럽이나 북미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때마다 곳곳에 무궁화가 피어있었고 하얀색, 분홍색, 빨강색, 보라색……등 색도 다양했습니다. 공원이나 정원, 울타리, 가로수 등 곳곳에 피어있어서 외국사람들도 좋아하는 글로벌 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이긴 하지만 공원이나 길가화단에서, 혹은 개인집 정원에서 가끔 무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무궁화마다 건강했고 꽃송이가 탐지면서도 수려했습니다. 단아하면서 겸허했고, 어느 곳에서든 뿌리내려 잘 사는 생명력에서 은근과 끈기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진딧물이 잘 생기고 오갈이 잘 드는 병약한 품종의 나무’의 나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 나도 무궁화야’ 하고 말문을 연 그 새벽 이후 시시때때로 다가가서 안부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아침, 가지사이를 헤적여보니 아직은 초록색 주머니에 단단히 싸여있는 꽃봉오리들이 조랑조랑 많이도 매달려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문득, 저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꽃피울 새끼들이 아닌가 생각하니 더욱 살가와졌습니다. 새벽정기로 촉촉하게 젖어있는 꽃송이를 보듬듯, 손이 닿지 않게 감싸 안고 입맞춤을 했습니다. 은은하게 나는 듯 마는 듯 향기, 이래서 훈화(薰化)라고 했던가. 환화(桓花), 천지화(天指花), '목근(木槿)', '근화(槿花)' 또는 '순(舜)' 그리고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그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음은 동서양 불문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뿌리내려 살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꽃만이 아니라 글로벌의 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각국에 한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어디가 되었든 한국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갑니다. 나 역시 그 깊은 새김을 되새겨가며 살고 있으니 내가 바로, 외국에 나가 사는 교민 모두가, 바로 한 그루의 무궁화들이 아니겠습니까. 

아홉 송이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엔 열여덟 송이, 그 다음날엔 스물다섯송이, 그 다음날엔……. 나날이 꽃송이들을 더 많이 피워내며 번성함을 보여주는 무궁화와의 대화, 타국에서 이뤄지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자식과 손자들까지 당당한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았습니다.
달포가 넘어 선 오늘 아침에도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무궁화나무 곁에 앉았습니다. 먼저 핀 꽃송이 몇 개가 떨어져있었습니다. 시들었으나 분명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순리에 순응하는 음전한 모습일 뿐. 
‘알지? 우리 함께 가자!’ 
떨어진 꽃송이들조차 아깝고 소중해서 모닥모닥 모아 나무 아래 흙으로 덮습니다. 
‘이제 거름이 되어라! 나도 그러마!’
기도문처럼 뇌며 나도 무궁화 한 그루임을 깊이 새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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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천학 | 문학컨설턴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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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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