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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문화·스포츠

기회의 땅인가, 불평등의 땅인가

노벨상 경제학자의 ‘미국 해부’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22 2024 02:11 PM

자본이 법·정치를 자기편 만들 때 ‘아메리칸드림’은 사실상 무너져 미국인 불만, 불평등보다 불공정 올바른 정책 펴야 모두에게 이득 재분배보다 선분배를 고민할 때 미국으로 이주한 디턴 교수의 답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면 정치적으로 보수주의가 된다.’

밀턴 프리드먼과 더불어 미국 경제학계 주류인 시카고학파를 대표하는 조지 스티글러는 1959년 이렇게 주장했다. 영국 출신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79)은 당시 “스티글러의 이 글을 읽었을 때 오타라고 생각했다”고 최근 펴낸 책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에서 고백했다. 믿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디턴은 자유 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와 대척점에 있는 유럽 케임브리지학파의 세례를 받은 학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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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거스 디턴이 2015년 10월 노벨경제학상 수상 소감을 밝히며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프린스턴=AP 연합뉴스

 

 

1983년 미국으로 이주한 디턴의 눈에 비친 미국은 별세계였다. 1970년대 이후 시카고학파가 장악한 미국에서 경제학자는 효율성의 수호자나 다름없었다. 형평성을 고려한 조세 시스템 설계 작업을 하던 디턴은 ‘전문가답지 못하다’거나 ‘전혀 흥미롭지 않은 사회 문제’라는 논평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영국 경제학자 사회가 소득 불평등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한 것과 달리 미국의 경우 최소한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한 고민이 없었다”고 돌이켰다. 디턴은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로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시장 경제가 지배한 미국… 경제학자가 망쳤나
이민자의 자녀에게까지 부와 기회를 약속하는 경이로운 나라 미국은 어쩌다 ‘불평등의 땅’이 됐을까.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은 미국으로 이주한 경제학자 디턴이 내놓은 답이자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1997년부터 25년간 영국 왕립경제학회 뉴스레터에 기고했던 글을 2022년 말의 관점으로 재구성해 책으로 엮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은 “규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자본이 법과 정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무너졌다. 디턴은 “지대추구자들이 존재하는 자유 시장은 ‘경쟁’ 시장과 같지 않다. 실제로 그런 시장은 자유 시장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데이터가 보여준다. 소득 불평등을 연구하는 저명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와 이매뉴얼 사에즈가 소득세 기록을 바탕으로 최상위 소득층의 엄청난 소득 증가를 자료화한 2003년의 기념비적 연구가 그 시발점이다. 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낙수 효과조차 사기극임을 보여줬다고 짚었다. 은행가들이 엄청난 부를 갖고 떠나는 동안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직장과 집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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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앵거스 디턴 지음·안현실 정성철 옮김·한국경제신문 발행·336쪽·2만3,000원

 

다수 미국인의 불만은 불평등보다 불공정에 있다는 게 디턴의 진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와 정치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를테면 혁신적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보인 기업가가 부자가 되는 건 당연하다는 합의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혁신을 멈추고 ‘만드는 자’에서 ‘빼앗는 자’로 변할 때다. 디턴은 “기업이나 기업협회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도록 하는) 로비와 이들에 대한 특혜 제공을 제한할 수 있다면 설령 조세 제도를 바꾸지 않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심은 강탈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책이 있다면 자본가 민주주의가 부유층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본주의를 버리거나 생산 수단을 선별적으로 국유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경쟁의 힘이 중산층과 노동계층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시 돌려놓을 필요는 분명히 있다. 소수가 다수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경제로 계속 질주하면 그 앞에는 끔찍한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탈 멈춰야… 재분배 아닌 선분배를”
디턴은 능력주의를 옹호했던 과거 견해도 철회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태어난 나 같은 세대에게는 시험 합격이 곧 기회의 통로이자 그 이전 특권과 불평등의 시대와 구분되도록 해줬다”면서도 “옛 불평등이 제거되자 새롭고 다른 형태의 불평등이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똑똑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가 계급·자산을 바탕으로 한 기회보다 이제는 더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앞서 디턴의 배우자인 앤 케이스 프린스턴대 공공국제정책대학원 명예교수는 증가하는 중년 백인들의 죽음을 ‘절망사’로 정의한 바 있다. 두 사람은 공동집필한 책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대학 학위가 없는 미국인들의 자살과 알코올·약물 중독으로 인한 절망사, 그것에 책임이 있는 미국 자본주의의 결함을 지적했다. 디턴은 “절망사 분석을 통한 비난의 화살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향하고 있다는 점에 분노하게 된다”며 “정책은 무력하고, 정부는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만들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사람들에게 도덕률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뿐”이라고 일갈했다. 경제학은 이런 게 아니다. 디턴은 이제 “재분배보다 선분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과 소득 이전 등이 일어나기 전 시장이 소득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선분배가 소득격차 해소 효과가 없는 재분배보다 더 유효하다는 얘기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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