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스포츠
[기획] “‘채식주의자’ 재판매해주길”
한강에 푹 빠져버린 베트남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24 2024 10:16 AM
동남아시아도 노벨상 ‘열기’ 현재 남은 책 ‘흰’뿐, 나머지는 절판 대형서점·온라인 등 소설 구매 행렬
한국 소설가 한강(54)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난 10일, 베트남 매체들은 일제히 수상 소식은 물론 그의 저서와 이력을 소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베트남 일간 투오이쩨는 “지난 몇 년간 노벨문학상은 상대적으로 무명 작가에게 수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올해 수상자의 저서는 베트남어로 출간돼 베트남 독자들에게 꽤 친숙하다”며 자국의 ‘인연’을 강조했다.
앞서 베트남에서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이 각각 ‘채식주의자(Người ăn chay·2011년)’, ‘인간의 본성(Bản chất của người·2019년)’, ‘하얀(Trắng·2022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채식주의자는 베트남 유명 대형 출판사인 쩨(Trẻ)에서, 나머지 두 권은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한국 작품을 번역·출간하고 있는 민영 출판사 냐남(Nhã Nam)에서 각각 나왔다.
지난 15일 베트남 하노이의 주베트남 한국문화원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흰'(아랫줄 왼쪽 세 번째)과 '소년이 온다'(네 번째) 베트남어 도서가 전시돼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현재 시장에 남은 책은 ‘흰’뿐이다. 나머지는 절판됐다. ‘흰’마저도 구하기 쉽지 않다. 지난 11일 오전 파하사, 프엉투 등 하노이의 대형 서점 9곳을 다녔지만 직원들은 “책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냐남 출판사 산하 서점 냐남에서는 “어제 급하게 확보한 ‘흰’ 100권이 오늘 오후부터 두 차례 나눠 들어온다”고 전했다.
반나절 뒤, 같은 서점에 다시 찾아가자 신간 코너에 ‘흰’ 열댓 권이 놓여 있었다. 냐남 직원은 “이미 나머지 50권은 입고되기 무섭게 나갔다”며 “한국문학이 이렇게 인기를 끄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서점을 찾은 시민들은 “이게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이냐”라며 관심을 보였다가, 누군가 발빠르게 예약해 둔 상품이라는 말에 아쉬운 듯 책 몇 장을 뒤적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온라인에서도 한강 소설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 ‘흰’ 새 책은 순식간에 동났고, 쇼피 중고 거래에서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도 품절됐다.’ 하노이의 한 중고 서점 주인 빈반(40)은 “비싸도 괜찮으니 채식주의자 중고 책을 구해 달라고 문의한 고객도 있어 수소문 중”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회사원 짠하이아잉이 15일 하노이 주베트남 한국문화원에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그나마 ‘소년이 온다’ 베트남판 도서 한 권은 하노이에 위치한 주베트남 한국문화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회사원 쩐하이아잉(24)은 시중에서 볼 수 없는 한강 작가 책 한 권이 한국문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15일 퇴근 후 곧바로 이곳을 찾았다.
한참을 소파에 파묻혀 ‘소년이 온다’를 탐독하던 그는 “노벨문학상 덕분에 한강 작가를 알게 됐고, 그의 글과 생각이 궁금해졌다”며 “책을 읽다 보니 작품이 단순히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자비’를 찾는 데에도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점이 독자로 하여금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저자가 어떻게 묘사했는지 탐구하고 싶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한강의 다른 책들이 베트남 서점에 풀리기까진 다소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베트남 유명 작가 겸 번역가 응우옌박링은 페이스북에 “출판사에 문의한 결과 ‘소년이 온다’는 긴급 재출간이 계획 중이지만 최소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며 “채식주의자는 (판권 계약이) 끝난 지 오래됐는데 현재까지 재인쇄 계획이 없다고 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저작자(한강)의 몸값이 높아졌기 때문에 아마 판권을 다시 구입하는 절차에는 시일이 걸릴 것 같다”고 부연했다.
베트남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에서 한국인 소설가 한강의 책 '채식주의자' 베트남어 버전 중고 도서가 품절 상태로 나타나 있다. 쇼피 캡처
“섬세하고 연약하지만 강한 힘 가진 작품”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현지 출판사 홈페이지 등 온라인상에서는 한강 소설을 읽었던 베트남인의 감상평과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몇몇 독자들의 글을 소개한다.
“한강의 책은 독특한 분위기와 강렬한 여운이 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몇 번이나 울었고, 책을 덮고 나서도 일주일 이상 머릿속에 맴돌았다. 매년 적어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이다. 글을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담당 출판사들은 제발 채식주의자 판권을 다시 사고, 두 권의 책(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을 빨리 재판매해주길 바란다.” (독자 응우옌즈엉)
“‘흰’은 시와 산문, 소설, 그리고 회고록의 경계 어딘가에 있다. 이 독특한 문체가 작가와 작품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낸다고 느꼈다. 흐릿하면서도 뜨거운 언니의 모습,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고통, 밝음과 어둠, 생명과 죽음, 현재와 과거의 혼재 속에서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 같다. 나에게 이 책은 섬세하고 연약한 동시에 내면에 강한 힘을 가진 작품이다. 많은 이들이 읽고 경험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다.”(독자 팜아잉)
지난 11일 베트남 하노이의 서점에서 한 시민이 바닥에 앉아 이날 입고된 소설가 한강의 '흰' 베트남어 버전을 읽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한강 소설에 나온 베트남전 언급을 인상 깊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2년 전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는 독자 응우옌남은 이렇게 말했다.
“소설에서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 중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 작가의 책을 통해 베트남 중부 일부 지역 사람들이 왜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감한 (역사) 문제에 목소리를 낸 한국 작가가 있다는 점이 꽤 놀라웠다. 어제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깊이 축하했다. 베트남에서도 그의 또 다른 훌륭한 작품을 접할 수 있길 바란다.”
동남아 노벨상 수상자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는 여럿이다. 식민 지배, 내전에 따른 상흔, 정치적 혼란과 빈곤의 역사를 보여 주듯, 동남아의 노벨상은 주로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평화상’에 집중돼 있다.
동남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79) 전 미얀마 국가고문이다. 그는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이루기 위해 비폭력 투쟁을 펼친 공로로 1991년 가택연금 상태에서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아웅산 수치(가운데) 전 미얀마 국가고문이 2012년 6월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을 한 뒤 토르비에르 야글란(왼쪽) 노벨위원회 위원장과 카시 쿨만 파이브 부위원장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수치 고문은 1991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21년간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한 탓에 공식 수상이 늦어졌다. 오슬로=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이후 수치 전 고문이 로힝야족 대량 학살을 수수방관한다는 비판이 일면서 평화상 수상에 빛이 바랬다. 미얀마군은 2017년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학살하거나 탄압했고, 7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집권했던 수치 고문은 로힝야족 문제에 침묵하거나 군부를 두둔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국제앰네스티 등 유명 인권 단체들은 2021년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다시 발생하고, 수치 고문이 구금되기 전까지 그의 수상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그래픽=김대훈 기자동남아시아 국가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동남아의 대표 민주주의 국가 동티모르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두 명이나 나왔다. 호세 라모스 오르타(75) 현 동티모르 대통령은 나라의 비폭력 독립 운동을 이끈 공로로 카를로스 필리페 벨로(76) 로마 가톨릭교회 동티모르 주교와 함께 1996년 평화상을 수상했다.
21세기 독립국 동티모르 독립운동사를 온몸으로 써온 오르타는 2007년 동티모르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됐다. 반면 공동수상자 벨로 주교는 1990년대 아동 성학대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 래플러 대표가 지난해 1월 18일 필리핀 마닐라 케손시티 호세 항소법원에서 탈세 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마닐라=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2021년에는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61)가 또 다른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러시아)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정치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진실 보도를 위해 헌신해 온 점을 인정받았다. 언론인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뒤 비밀리에 재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독일의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1935년 수상한 이후 처음이었다.
2012년 온라인 탐사보도 매체 ‘래플러’를 창립한 레사는 특히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을 집중 비판했다. 그의 역점 사업이었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필리핀 서민들에게 집중했다는 평가다.
레둑토(앞줄 왼쪽) 북베트남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과 헨리 키신저(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전 종전 내용이 담긴 '파리평화협정' 체결을 마친 뒤 나란히 협상장을 나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철저하고 엄격한 심사로 ‘전 인류에 가장 공헌한 이’를 가려낸다는 점에서, 노벨상은 개인은 물론 조국의 명예까지 드높이는 영광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북베트남 공산당 중앙조직위원장이었던 레둑토(1911~1990)는 1973년 1월 베트남전 종전 협상을 주도한 공로로 같은 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레둑토는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고, 나는 전시 지도자이지 평화 사도가 아니다”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주역 중 한 명인 키신저 전 장관과 공동으로 결정된 데 대한 불만의 표시라는 관측도 나왔다.
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www.koreatimes.net/문화·스포츠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