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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04 2024 01:19 PM
오늘처럼 새벽 공기가 서늘할 때는 이부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잠은 벌써 달아났는데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뜸을 들이다가, 오래 전 이맘때쯤이 떠올랐다. 1999년경, 고국에서 봉급쟁이 할 때다. 직장은 여의도, 집이 일산신도시 <밤가시마을>이었다. 운전 때문에 퇴근 후, 혼자 홀짝거리기 위해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집에서 걸어 한 6분 거리다.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인테리어도 별반 없이 시멘트벽에 테이블 5개, 10평정도 크기의 작은 가게였다. 40대 초반이던 주인 부부는 원래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에 한참 유행(?)이던 전교조 운동을 하다가 직장에서 둘이 함께 잘렸다. 당시 아이 둘이 있고, 분양받은 주택의 대출금도 갚아야 했다. 당장 먹고살 걱정에 둘이서 밤마다 술을 먹다가 ‘차라리 우리가 술집을 차려 놓고 먹으면 어떨까?’ 싶어 집 지하에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카페를 처음 한 부부는 경험이 없어 동네 슈퍼에서 맥주와 소주, 안주 거리를 사다가 팔았다. 돈이 없으니 사과 궤짝을 뜯어서 유화 물감으로 <돌체>라고 써서 간판을 걸었다. 내가 처음 그 카페를 들어갔더니, “어떻게 알고 왔냐?”고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방문 후, 보름에 한번 정도 들리는 단골이 된다. 한 5 개월 뒤, 한집 건너 옆집에 다른 카페가 들어선다. 1년 뒤에는 길 건너편에도 카페가 생긴다. 지난해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그곳은 부산한 카페 골목이 되어 있었다.
이 카페는 거의 손님들이 알아서, 냉장고에서 맥주 꺼내다가 먹고 기본 안주 도 본인들이 가져다 먹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안주도 멸치와 땅콩 등 마른안주뿐이었고 만드는 요리는 거의 없었다.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는 마카로니 과자였다. 주인은 “원통형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긴 것이어서 ‘파스타 마카로니’와는 무관한 것이에요”하며 별거 아닌 메뉴를 선생처럼 정성껏 설명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 온 손님에게는 “저렇게 알아서 꺼내 먹는 거예요?”하며, “계산은 나중에 DJ 부스에서 하시고요” 그가 “몇 병 드셨죠?”하면, “소주 1병 하고, 맥주 2병! 그리고 기본 안주.” 이런 식이었다. 여주인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인지, 문을 닫을 즈음에나 한 번씩 얼굴을 내밀곤 했다.
김현식은 1958년에 태어나 1990년 11월 1일, 32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초창기(?) 단골이어서 대개의 손님들을 알았다. 카페 단골 중에 30대 중반의 올드미스가 있었다. 그녀는 무슨 미대를 나왔고, 가끔 칼럼을 쓰기도 하는 무면허 글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얼굴은 그리 예쁜 편은 아니지만, 나름 매력 있고 다소 통통했다. 술을 정말 좋아했고 처음 본 사람들과도 대화를 잘하는 친화력이 있었다. 동그란 뿔테안경을 쓴 그녀는 역사와 정치 등 이슈가 되는 논쟁을 즐겼다. 오랜만에 가게에 들렀더니, 나를 보며 “저, 승진했어요.”하며, 무급 직원이 됐다며 자랑을 한다. 점차 손님이 늘자, 일 손이 부족한 주인이 “일을 도와주면 가게에서 술은 공짜로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뒤, 그녀는 내가 그곳에 가면 VIP 멤버로 대접해 안주를 무한 리필을 해 주었다.
카페 주인은 음악을 좋아해서 헌 LP판을 청계천에서 사다가, DJ 부스를 만들고 손님들에게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었다. 다소 촌스럽지만, 취객들의 낭만을 채워 주기에는 충분했다. 어느 날 야근 후, 평소처럼 한잔하고 싶어 그곳에 들렸다. 벌써 12시가 다 되가는 시간이어서 손님들은 거의 떠나고, 한 테이블의 무리만 있었다. 마침 그녀는 손님들과 앉아 한참 수다를 떠들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맥주 1병을 가져 다 주며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세요?”하며 취기 섞인 말로 인사를 건넸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죠? 기분이 좋으시네…”하며 나도 반갑게 대꾸했다. “지금 이 음악 들어 보세요”한다.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아, 이거 김현식의…?” 하며 제목이 생각이 안 난다는 표정을 짓자, “네, 맞아요. <내 사랑 내 곁에>, 오늘이 바로 김현식 죽은 날이 에요”하며, 자기가 김현식의 엄청 팬이라고 장황하게 설을 푼다.
김현식의 대표곡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사랑했어요〉 등이 있다. 그의 임종을 지킨 누나 김혜령은 토론토에 이민 와 살고 있다.
DJ 부스에 앉아 있던 주인을 쳐다보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술 많이 먹었어요’ 하는 몸짓을 보낸다.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는 주인의 표정을 느꼈다. 서둘러 잔을 비우고 가게를 나왔다. 내가 마지막 손님이니 주인과 그녀도 함께 가게 문을 닫고 올라왔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취한 그녀가 자동차를 타고 가려 하자, 주인이 음주 운전하면 안 된다며 택시를 타고 가라며 나무랐던 것이다. 그녀는 가게에서 차로 5분쯤 떨어진 주엽동 근처에 살고 있었기에 평소에는 조심스레 운전하곤 했지 싶었다. 하지만, 그날은 주인이 차를 놓고 가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걸어갔고 주인은 그 뒤 모습을 보고 집으로 올라갔다.
몇 주 뒤, 카페에 갔더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DJ 부스에 있던 주인이 다가와서, “소식 들었어요?”한다. “’뭔, 소식이요?” 했더니, 그녀가 그날 택시를 타러 갔다가 잡히지 않자, 돌아와 차를 몰고 가다가 교차로에서 변을 당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아이고, 무슨 그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 “오늘이 바로 김현식 죽은 날이에요”하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요즘도 10월 말이 되면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주 라디오에 나온다. 김현식은 1958년에 태어나 1990년 11월 1일, 32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였다. 대표곡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추억 만들기〉, 〈사랑했어요〉 등이 있다. 그의 임종을 지킨 누나 김혜령은 토론토에 이민 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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