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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구 판매로 '환상의 세계' 안내하는 김소연
드라마들이 '여성 성욕 억압' 직격하는 이유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15 2024 12:16 PM
과거엔 불륜 등 소재 제한적 활용 최근엔 ‘자아 찾기’ 주제로 연결 여성 욕망 억압하는 사회 직격 ‘저출생 여성 탓’ 반작용 해석도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이 여성용 진동 성기구인 바이브레이터를 방문 판매하고 있다. 방송에선 이 성기구가 모자이크 처리됐다. JTBC 제공
#1. 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은 방문 판매원이다. 주력 판매 상품은 여성용 진동 자위 기구인 바이브레이터다. 때는 1992년 가상의 지역인 금제. “진짜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어?”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부 금희(김성령)가 바이브레이터 사용 후기를 묻자 정숙은 “네”라고 답한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정숙은 “안 써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 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며 “사업에 자신감이 생겼다”며 웃는다.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이 편의점에서 남자친구의 피임 제품을 직접 사고 있다. tvN 영상 캡처
#2. “한 개로 돼? 오늘 밤도 너만 좋고 끝내면 네 인생도 끌낼 거야.” tvN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주인공 해영(신민아)은 이런 말로 남자 친구를 구박한 뒤 편의점에서 10여 개의 콘돔을 집어 계산한다. 해영이 생각하는 ‘조신함’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피임을 잘하는 것이다. 그는 “21세기의 조신은 ‘노콘(콘돔), 노섹스’”라고 말한다. 그런 해영에게 동성 친구 희성(주민경)은 여성용 자위 기구를 선물로 준다.
여성이 성욕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드라마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정숙한 세일즈’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성인용품 판매를 소재로 ‘여성의 성적 욕망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환기했다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해영 등을 통해 21세기 여성 성욕의 양상을 과감하고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간 TV 드라마에서 성욕은 남성의 전유물처럼 그려졌고, 여성은 성적으로 대상화되기 일쑤였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 변화다.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서영복(왼쪽 첫 번째, 김선영)이 여성 속옷을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 제공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주인공 정숙(김소연)이 여성 성 용품 방문 판매를 시작한 뒤 그의 집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SEX' 문구를 지우고 있다. JTBC 제공
여성의 성욕을 그리는 방식도 확 달라졌다. ‘미스트리스’(2018) 등 드라마에서 여성 주역들의 성욕이 불륜이나 스릴러의 음습한 소재로 주로 활용됐던 것과 달리 ‘정숙한 세일즈’ 등에선 진정한 자아 찾기란 주제로 연결된다. 여성의 가치를 ‘정숙함’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인식 변화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직격하는 방식으로 대중문화에서 뒤늦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시대’에 여성의 성 해방이 갑자기 왜 K콘텐츠의 화두로 떠올랐을까.
이런 흐름은 여성 혐오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제기되며 존재를 위협받는 여성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정숙한 세일즈’에서 여성용 성용품을 판매하는 정숙은 일상에서 물리적 ‘테러’를 당한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다룬 티빙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일부 시민단체의 “동성애를 미화한다”는 항의를 받고 예고편을 온라인에서 한때 삭제했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공희정 대중문화 평론가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성욕이지만 여성들은 ‘정숙’이란 사회적 틀에 오랫동안 갇혀 주체성을 침해받았다”며 “’정숙한 세일즈’는 그 억압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취약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면서, 기본권 침해로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의미를 짚었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속 동성 연인의 모습. 티빙 제공
여성의 성욕을 조명하는 콘텐츠 제작 바람은 저출생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데 대한 반작용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복길 대중문화 평론가는 “두 드라마는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인정,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철폐, 여성의 경제적 안정과 지위 향상만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친근하게 설파한다”며 “여성의 이기심을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 대한 반론처럼 들리는 게 공통된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일보가 ‘정숙한 세일즈’ 1회와 최근 방송 회차인 8회의 성·연령별 시청률을 확인해 보니, 여성 10대 시청률이 전 연령 통틀어 가장 많이 증가(233%)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여성의 성에 대해 다루는 드라마는 거의 없었고, 다룬다고 해도 남성을 전제로 하는 연애 담론에 머물렀다”며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성에 대해 통제받는 10대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 봤다.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이주리(이세희)와 무능한 남편 대신 집 생계를 책임지는 서영복(오른쪽, 김선영)이 속옷을 직접 입고 방문 판매하고 있다. JTBC제공
파격 소재를 통한 콘텐츠 제작 변화에 배우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여자대학 출신으로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 성인용품 판매로 삶에 대한 욕망을 되찾는 금희를 연기한 김성령은 “이런 얘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도 이제 괜찮지 않나 싶었다”고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들려줬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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