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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비움’으로 채우고 ‘이음’으로 넓히다
관계를 사유하는 건축 위상학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25 2024 09:52 AM
인간이 세상의 주체가 되어 주변 세계를 지각하고 공간을 경험하는 건축 현상학은 인간 중심 관점으로 진리를 형성한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이론이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다. 이는 건축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현대 건축으로의 대전환을 가져온다. 현대 건축은 현상학과 형태 중심 건축에서 벗어나 공간을 위상학적으로 재정의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건축을 선보인다.
관계를 사유하는 건축 위상학
위상학을 이해하려면 우선 공간에 있는 대상의 크기, 모양, 위치와 같은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을 알아야 한다. 기하학은 크게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나뉘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대표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삼각형, 사각형, 원을 서로 다른 특성과 형태로 정의하고 이해한다.
그에 비해 공간에서 특정한 관계를 정의하는 위상학은 하나의 형태를 찢지 않고 변형하는 것은 같다고 정의해 구, 도넛, 프레츨처럼 빈 공간을 관통하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위상을 만든다.
현대 건축에서는 위상학의 개념을 빈 공간이 건축물을 가로지르는 관통이나 채움과 비움의 관계로 이용한다. 또는 건축물은 땅 위에 세워야 한다는 기존 건축의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땅과 건축을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관계를 제안한다.
땅이 가지는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맥락의 의미를 찾아 공간을 장소화하는 것이 건축 현상학이라면 건축 위상학에서는 공간이 다양한 관계들로 정의된다. 그 결과 대지와 건축물의 관계가 모호하거나 건축물에 대지의 연속적인 특성을 부여하여 내·외부공간을 연결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드러내는 특성인 모호함과 다양성 그리고 네트워크를 공간화한다.
관통과 비움, 아모레퍼시픽 사옥
건축물의 정면, 측면, 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게 설계된 서울 용산구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서울 도심부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했다. 주변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흰색 루버(창살)로 둘러싸인 단순하고 투명한 유리 박스가 인상적이다. 놀라운 것은 건축물의 정면, 측면, 그리고 심지어 지붕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땅값이 비싼 서울에서 건폐율과 용적률을 꽉 채운 건물을 만들어도 모자랄 텐데 여러 개의 커다란 빈 공간이 건축물을 관통하는 것 자체가 매우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축적으로 이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비워진 공간에 만들어진 공중 정원에서 쉬거나 때로는 그곳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위안을 느낀다. 위상학적 관통을 이용해서 물리적으로 건축물을 비워내고 대신 공간을 다양한 잠재성으로 채운 것이다. 위대한 건축가의 과감한 설계는 서울에서 드물게 성공적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비움이 채움만큼이나 중요하며 비움이 공간을 관통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사지에 떠 있듯이…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매스가 경사지에 떠 있어 거대한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국내 최초의 대학 미술관인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OMA 건축사사무소)의 설계로 완공되었다. 서울대 미술관은 서울대 캠퍼스 입구 옆 경사지에 위치하는데, 마치 직육면체가 경사지에 걸터앉은 채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조각 작품을 연상시킨다.
서울대 미술관은 건축물을 위해 지형을 바꾸지 않으면서 대학 캠퍼스와 외부 지역 사회를 연결하도록 디자인했다. 이러한 설계 의도는 건축물을 경사 지형에 맞춰 자르고 지역 사회와 캠퍼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로 구체화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거대한 매스(덩어리)는 캔틸레버(한쪽 끝만 고정되고 다른 끝은 기둥이 없는 보) 철골 구조물과 중앙 콘크리트 코어에 의해 지지된다. 내부는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경사로 동선을 이용한 공간을 구현해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 기획을 가능하게 했다.
속세와 종교 잇는 명동성당 광장
계단형 광장이 들어선 명동성당의 모습. 간삼건축 홈페이지 캡처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명동성당이 최근 명동 지역 개발과 함께 새롭게 탈바꿈했다. 명동성당 마스터 플랜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행정 업무가 이뤄지는 교구청 청사를 신축하고, 완공 당시의 동산과 나무로 꾸민 유선형 경사로를 복원하며, 누구나 성당을 찾아와 쉴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간삼건축이 맡은 명동성당 종합계획의 핵심은 명동길에서부터 명동성당 주 예배당까지 연결하는 계단형 광장이다. 성당 앞에 펼쳐진 경사 광장은 서로 다른 대지의 차이를 연속되게 연결해 인간 사회와 종교 공간을 하나로 잇는 대지건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건축물로 광장을 구성해, 유서 깊은 건축물인 명동성당의 역사적 흔적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광장은 제일 위쪽에서 명동성당의 첨탑을 축으로 위계를 드러내며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녹지를 즐길 수 있다.
새로운 광장의 내부는 또 다른 지하 광장으로 조성해, 종교 화합의 장이자 신도와 시민이 구분 없이 공유하도록 했다. 하나의 마을처럼, 미로처럼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색적인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새로 조성된 명동성당의 외부 광장과 내부 아케이드를 보면 시민을 향해 문을 활짝 여는 모습이다. 성당이 축성되었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명동 길과 성당을 연결하는 연속된 대지의 위상학적 공간은 종교적 공간인 위쪽과 현실의 세계인 아래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만든다.
땅에서부터 건물까지 이어지는 지붕…청주시청사
청주시청사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의 조감도. 신청사가 옛 청사를 디귿(ㄷ) 자로 감싸는 구성으로 설계됐다. 청주시 제공
충북 청주시는 2020년 청주시청사 국제설계공모에서 노르웨이 건축가 로버트 그린우드(스노헤타 건축사사무소)의 설계안을 선정해 건립을 추진해 왔다. 당선작은 청주의 미래를 그려낼 새로운 청사가 기존 청사를 디귿(ㄷ) 자 형태로 감싸안은 구성으로 주목받았다.
청주시는 공모 당시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기존 청사를 존치한 채로 새 청사를 설계하는 방안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로버트 그린우드가 제시한 설계안은 옛 청사가 지역 사회에서 가진 역사적 의미를 한국 전통 건축 요소인 처마로 형상화해, 이를 지상에서부터 청사 지붕까지 연속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대지건축의 특성을 부여했다. 이로써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건축 공간과 장소성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청주시는 새 시장이 취임하자 옛 청사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철거하는 방향으로 공모를 다시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기존 설계안은 폐기되었다. 공모전 당선작의 뛰어난 위상학적 건축 디자인 개념이 구현되지 못하게 돼 아쉬움이 크다.
건축가는 진리 찾아 헤매는 구도자
진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마치 코끼리와 같아서 수많은 다른 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부분을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의 형태를 이해하는 한계가 있듯이 어떤 사고방식도 진리 전체를 모두 파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각각의 사고방식 한계를 인정하고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에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현대 건축은 여전히 어두운 방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고, 건축가는 나름대로 헤맴의 의미를 공간으로 보여 주는 구도자라 할 수 있다.
글·사진=정태종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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