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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휴양처 마요르카 섬 발데모사를 가다 (상)
손영호 |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Dec 05 2024 03:38 PM
지난 11월,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11박 12일의 여정이었는데, 필자가 관심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마지막 일정에 마요르카 섬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요르카 하면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다. 대한민국 애국가 작곡가이며 '코리아 환상곡(Symphonic Fantasy Korea)'을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이다. 1946년 7월5일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Lolita Talavera, 1915~2009)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단하는 등, 마지막 생애 20년을 보냈던 곳이다. 선생의 유해는 1977년 7월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봉환되었다.
스페인 자치령인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는 총인구 약 1백만 명으로 그 절반이 수도인 팔마(Palma)에 거주하고 있다. 그 중 팔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져 있는 세라 데 트라문타나 산맥(Serra de Tramuntana)의 해발 500m에 위치한 발데모사(Valldemossa) 마을은 인구 약 2천 명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바로 이 발데모사를 방문하기 위해 크루즈 여행에 나선 것이다.
배가 팔마에 정박하자마자 우리 부부는 택시를 대절하여 발데모사로 향했다. 마요르카 태생의 운전 기사 카를로스가 발데모사 외에 다른 곳도 가이드해 주는 등 여간 싹싹하고 곰살스러운 게 아니다.
먼저 데야(Deja) 해안을 둘러보고 다시 발데모사로 향했다. 에머럴드색 지붕이 인상적인 카르투하 수도원(Monasterio de la Cartuja)은 11세기에 아라곤 왕의 여름 왕궁으로 지어졌으나 1399년에 수도원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발데모사는 마요르카의 수호성인 카테리나 토마스(Caterina Tomas, 1531~1574)가 태어난 곳이다. 수도원에는 작고 아담한 레이 호안 카르레스 정원(Jardins Rei Joan Carles)이 반긴다. 그 정원 입구에 눈을 감고 있는 쇼팽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발데모사 수도원을 배경으로 작고 아담한 정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쇼팽의 흉상과 현판.
1830년에 스페인 정부는 몇몇의 유명인들을 마요르카로 초대했었는데, 그 중에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과 그의 연인인 프랑스인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가 포함돼 있었다. 그들이 1838년 11월8일부터 14일까지 마요르카의 팔마에, 11월15일부터 다음해 2월11일까지 발데모사에 머물렀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쇼팽 박물관을 들렀다. 입장료가 시니어 할인이 적용된다. 수도원의 정문 왼쪽 별관에 쇼팽 박물관이 있다. 쇼팽 박물관은 마요르카 팔마 출신 화가, 미술비평가인 바르토메우 페라(Bartomeu Fera i Juan, 1893~1946)가 1917년에 안네 마리 부트룩스(Anne-Marie Boutroux de Fera)와 결혼하여 쇼팽과 상드가 머물렀던 수도원의 방에 정착하면서 1929년에 개인박물관으로 설립되었다.
쇼팽박물관과 성당으로 가는 홀 구석에 사람 키의 두 배 이상 큰 쇼팽과 상드의 정장 차림의 대형 인형이 서 있다.
그러나 쇼팽과 상드가 머문 발데모사의 수도원에는 그다지 많은 것들이 남아있지 않은데, 쇼팽이 걸린 결핵을 두려워한 현지인들이 대부분의 가구들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쇼팽 박물관은 수도원의 2호실과 4호실에 위치하게 되었다.
쇼팽 박물관과 성당으로 가는 홀 구석에 사람 키의 두 배 이상 큰 쇼팽과 상드의 정장 차림의 대형 인형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2호실에는 쇼팽이 작곡할 때 사용했던 마요르카산 피아노와 바이올린, 편지, 원고, 초상화와 스케치 등이 보관돼 있다. 그 외에도 쇼팽의 데드마스크(dead mask)와 왼손 석고가 있고, 그의 머리카락이 상드의 책 사이에 보관돼 있다. 이것은 모조품이다.
4호실에는 쇼팽이 파리에서 가져온, 그러나 수송 분실로 그가 마요르카를 떠나기 3주 전에서야 겨우 받은 프레옐(Pleyel) 어프라이트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우여곡절을 겪은 피아노는 높은 관세로 인해 발데모사에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그 후 페라의 후손들과 상드가 거래한 은행의 은행장 퀘트글라스(Quetglas)의 후손들 사이에 3대에 걸친 법적 투쟁이 일어났다. 드디어 1990년대에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 프레옐 피아노가 있는 4호실은 은행장 가족에게 소유권이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4호실은 추가로 입장료를 받는다.
쇼팽박물관 2호실: 쇼팽의 데드마스크, 왼손 석고형상. 모조품이다.
쇼팽은 20세 때인 1830년 11월에 폴란드를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체류하다가 그 다음해 9월에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처음 6개월간 꽤 고생을 했던 쇼팽은 1832년 2월26일에 파리의 유명한 프레옐 피아노 회사의 살 프레옐(Salle Pleyel) 콘서트홀에서 가졌던 데뷔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인지 휴양지에까지 가져갈 생각을 할 정도로 프레옐 피아노에 대한 애착이 퍽 깊었던가 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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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