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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부엉이
홍성철 | 전 문협회장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Dec 30 2024 04:16 PM
'황혼이 깃들어야 날개를 편다.'
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 뭔가 근사한 퍼즐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단번에 풀어내지 못한 퍼즐은 나의 호기심을 끌며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 되었다. 헤겔의 이 명제는 나의 대학 시절 2년을 넘게 지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역사와 법, 사상 등 전체를 끌어담은 헤겔의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세상을 통찰하는 혜안을 얻을 것만 같아서 였다. 대학 때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독일어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좋았다면 독어로 원전을 접했어야 했다. 결국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대한 나의 열정은 그럭저럭 관심 두던 선에서 멈췄고, 졸업반이 되면서 낭만적 탐구보다 훨씬 더 열심으로 취업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 정보과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구속되고 강제로 징집된 선후배들에게 평생 미안함을 안고 살아왔다.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와줄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12살 소녀, 한강이 5.18 사진첩을 처음 보고 품었던 질문이라고 한다. 불행했던 과거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되어 시대를 밀고 나와 한국을 발전시켰음이 분명하다. 역사학자 E. H. 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길게 설명하면서 결론으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했다. 그 내용을 한강 작가는 짧고 선명하게 말한 것이다.
12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공교롭게 한강 작가가 그 수상 연설을 하던 날,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과거'로 부터 도움받던 '현재'가 주술적 미래의 과거인 현실과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면서 한국은 꾸준히 민주화를 이루고 성과를 만들어 왔다. 어느 날 손바닥에 王자를 적은 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나서, 과거를 딛고 발전하던 대한민국의 '현재'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술이 실권으로 난무하는 시대로 전락했다. 급기야 계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대의 반란이 일어났다. 국가의 대표자가 국민을 상대로 반란을 자행하다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나 무섭고 분노가 치미는 사건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한 헤겔은 우리의 세상을 늘 새로운 도전이 등장하는 무대로 해석했다. 그 새로운 도전은 기존의 질서에 영향을 주는데,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가 서로 운동하듯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좌충우돌하지만 언제나 역사는 그렇게 진행한다고 서술했다. 그는 그것을 발전이라 했다. 결국 사건은 정신으로 들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헤겔 자신도 독일로 침공해 시가행진 하던 나폴레옹을 보며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를 '말 위에 탄 시대정신'이라 칭하며 열광했었다. 그러나 곧 심각한 모순을 접하면서 그 찬양을 거두어야 했다.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사건의 진행이 지나간 후에야 진정한 평가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깨닭았다. 그러한 의미를 헤겔은 은유적으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날개를 편다'고 했던 것이다.
44년 전 광주에서 참극을 자행하고 계엄으로 절대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그 후 16년이 지난 96년도에 사행 선고를 받았다. 비극은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감형되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무고한 수천 명의 죽음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 가련한 영혼이다. 그의 '현재'는 '과거'와 대화하지 못한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는 당연함에 대한 공권력의 파괴적 폭력에는 용서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내란의 우두머리는 사형 혹은 종신형에 해당하는 중죄라 한다.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은 국민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국가의 신임도를 처참하게 떨어트렸다. 탄핵당한 대통령은 계엄이 자신 뜻에 반하는 집단을 향한 경고였다고 하며, 그저 하나의 소동이라고 주장한다. 내란의 주동자이니 그렇게 억지를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엄호하고 탄핵을 무효화 하려는 국회의원 집단의 주장은 정말 내란의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한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계엄이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고 하는 그들의 변명에 대해, 강간을 고도의 애정 행위라 하고 도둑질을 고도의 경제 행위라고 한다는 풍자가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탄핵을 반대하게 되면 결국 그런 계엄을 언제든 다시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들 손으로 지혜의 신 미네르바가 거느리는 부엉이를 날개 꺾어 굿판의 제물로 올리는 격이다.
헤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또한 사건이 정신에 영향을 주는 상호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과거'는 '현재'를 도와서 국회를 지켜냈다. 백만 시위자가 모여 사건 사고 하나 없이 질서정연하게 주장을 펼쳤고, 오히려 서로 베풀었다는 미담이 들려온다. 한밤중 영하의 날씨에 남태령에서 막힌 농민 시위대의 트랙터가 고개를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우금치의 동학 농민이 '현재'를 도와준 것이라 하겠다. 응원봉이 탄핵봉이 되는 현상은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이 실제에서 나타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난도 많고 시련도 많았던 한민족은 지금에 이르러 내란 수괴에 대한 처벌을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로 남겼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위헙받는 격한 혼란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청산하지 못한 부역자 집단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다. 이번이야말로 부당한 기득권과 진정한 이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어렵고 힘든 이 과정을 마칠 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가 다시 '현재'를 도울 수 있도록 응원봉이라도 들어야겠다.
홍성철 | 전 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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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