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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은 ‘침묵의 언어’에 열광했다

페터 바이스의 ‘마부의 몸의 그림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20 2025 11:56 AM

1차 대전 중인 1916년 태어나 화가·작가·실험영화 감독 활동 1982년 스웨덴서 심장마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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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바이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마부의 몸의 그림자’는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를 포함하고도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았으나 한두 페이지를 아주 힘겹게 읽은 다음 중단해버린 기억이 있다. 십여 년이 흐른 뒤 우연한 계기로 손에 들어온 페터 바이스의 자전적 소설인 ‘부모와의 작별’을 읽던 도중에 문득 내가 ‘마부의 몸의 그림자’를 읽다가 중단한 사실이 떠올랐고, 즉시 ‘부모와의 작별’을 중단하고 ‘마부의 몸의 그림자’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부모와의 작별’을 통해서 페터 바이스를 처음 알게 되었고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다른 작품들을 모조리 찾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부의 몸의 그림자라니, 제목에 공공연히 드러난 이중의 2격(소유격) 표현은, 독일어에서 이중 2격이 거의 금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 독자에게도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그리고 한두 페이지를 용기 내어 읽기 시작한 독자는 거의 예외 없이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내용과 설명 없는, 극도로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로 이루어진 이것은 정녕 소설인가? 종국에는 마치 얼굴도 색채도 없는 한 편의 그림자극이 펼쳐지면서, 시작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 채로 돌연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내가 작성한 내면의 매혹의 리스트에 이 책이 올라갈 것임은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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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의 몸의 그림자' 독일어 책. 이 책은 한국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설명 없이 묘사로만 이루어진 소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걸어서 하루 정도 걸리는 외딴 시골의 외로운 농가 한 채. 그곳에는 주인 농부 부부와 아이들, 일꾼과 가정부 이외에도 이들과 전혀 연관이 없을 듯한 몇몇 사람들이 머물고 있다. 화자는 그중 한 사람으로, 주변 환경과 거주자들의 일상과 현재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작가는 아마도 “묘사어”라고 불릴 수 있을 새로운 소설적 언어를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클로드 시몽을 연상시키는 수준의 묘사는 하지만 그 어떤 감정이나 느낌의 주관적 개입 없이, 오직 사물과 사건의 표면과 외형에만 집중한다. 

등장인물들은-그런데 이들을 통상적인 의미의 등장인물로 볼 수 있을지, 이들은 과거나 미래가 없으며, 심리나 내면을 갖지 않는다-오직 외모, 행동거지, 움직임, 반복되는 일상의 독특한 동작, 예를 들어서 음식을 먹을 때 입과 혀의 움직임 등으로 특징 지어질 뿐이다. 심지어 이들의 언어도 기이하리만큼 항상 분절적이다. 이것은 화자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 열쇠 구멍으로 훔쳐본 것, 열린 문틈으로 들려온 조각난 말의 파편들을 외형에 충실하게 받아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인물과 심지어 세계 자체는 흔히 독자가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서사를 이끌어 가거나 갈등과 반전을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 마치 화가의 시선 아래 놓인 오브제와도 같다는 인상을 준다.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아주 치밀하여 종종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나 의미나 해석, 설명은 전적으로 부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을 통해서, 세계의 보여지는 행위와 관찰되는 객관적 특성들만으로 사건들이 구성되는 효과가 있다. 도대체 그 어떤 정서적 유대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 이질적인 집단은 무슨 이유로 하필이면 이 외딴 장소에 모여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극단적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재료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저변에는 정체모를, 베케트의 고도를 연상시키는 기다림이라는 묘한 긴장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농가에 석탄을 배달해주는 마부이다. 그리고 정말로, 소설의 마지막에 무거운 석탄 자루를 마차에 실은 마부가 도착하고, 그 사건은 화자를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이방인의 ‘말하는 침묵’
‘마부의 몸의 그림자’는 페터 바이스가 1952년에 썼으나 출판사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원래의 꿈이었던 화가 그리고 실험영화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그 또한 바라는 만큼 잘 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친구의 도움으로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와 연결되어 1960년 뒤늦게 ‘마부의 몸의 그림자’가 출간되고 많은 관심과 큰 호평을 받았다. 거기에는 페터 바이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대적 우연이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통적인 글쓰기에 대한 대안으로 프랑스의 누보로망(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이나 관습을 부정하고 새로운 수법을 시도한 소설)이 다시 각광받고 있었는데, ‘마부의 몸의 그림자’가 발표되자 그것이 프랑스 누보로망에 대응할 만한 독일 문학의 해답으로 보였던 것이다.

 

 

페터 바이스란 이름은 3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저항의 미학’, 희곡 ‘수사’, ‘소송’, ‘마라/사드’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이 종종 정치적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으므로 사회적인 질문을 주로 다루는 작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작가로서 페터 바이스의 관심사는 그의 재능과 박식함, 그의 삶의 여정만큼이나 다양하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짙은 그의 초기작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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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1·페터 바이스 지음·탁선미 옮김·문학과지성사 발행·566쪽·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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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사드·페터 바이스 지음·박준용 옮김·지만지드라마 발행·194쪽·1만6,800원

 

페터 바이스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베를린 인근의 노바베스에서 태어났다. 슬로바키아 출신 아버지는 직물상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중위로 폴란드에서 주둔 중이었고 어머니는 첫 번째 결혼으로 이미 두 아들을 두고 있던 전직 도이치테아터 배우였다. 전쟁 후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 시민권을 취득했고 가족들은 독일 브레멘과 베를린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은 번창했고 페터 바이스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가족은 런던으로 이주해야만 했고 이후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가 최종적으로 스웨덴에 정착했다. 그 이유는 페터 바이스의 아버지가 유대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가족 내에서 함구되었고 그래서 어린 시절 페터 바이스는 자신들이 이방인 취급받는 것이 체코 국적 탓이고 이민 역시 사업상의 이유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대 혈통에 대해서도 부모로부터가 아니라 이복형으로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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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 페터 바이스. 위키미디어 커먼스

 

베를린 시절에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된 페터 바이스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당시 이미 나치의 위협을 피해 해외로의 도피를 계획하고 있던 아버지는 가족의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그가 상업학교로 가서 좀 더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 집안의 사업을 돕기를 희망했으므로 갈등이 빚어졌다. 1934년 그가 사랑한 여동생 마르기트가 교통사고로 죽자 페터 바이스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정신적으로 부모와의 작별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발발과 이민생활의 불안정, 예술가로 경제적인 자립의 불가능성 때문에 부자간의 고전적인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1940년에야 페터 바이스는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스톡홀름으로 이사했다. 스웨덴에서의 생활은 그가 스스로를 이민자라고 가장 강하게 자각한 시절이었다. 이주 당시 그는 스웨덴어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웨덴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전시회를 열었으며 스웨덴어로 책을 쓰기도 했으나, 그리고 스웨덴 국적을 얻어 1982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스웨덴에서 살았음에도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음”이라는 이방인 의식은 페터 바이스의 글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마부의 몸의 그림자’ 무대인 외딴 농가는 아마도 페터 바이스가 잠시 머물렀다고 알려진 스웨덴의 피난민 숙소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인 화자의 “말할 수 없음”의 상태가 설명된다. 화자는 묘사하고 기록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침묵을 지킨다. 이방인, 달아난 자, 가족으로부터 작별한 자에게 속하는 그것은 역설적으로 텅 빈 수다에 대항하는 “말하는 침묵”을 연상시킨다. 스웨덴에서 화가로서나 작가, 실험 영화감독으로 많은 시도를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요원했으므로 마침내 예술가의 길을 거의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암울하던 시기, 예전에 써 둔 원고 ‘마부의 몸의 그림자’가 독일에서 출간된다. “어휘의 그래픽”, “마이크로 소설”이라는 명칭을 얻은 이 책은 즉시 큰 센세이션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자전적 소설인 ‘부모와의 작별’, ‘소실점’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것이 전후 독일 아방가르드 문학의 큰 별 중의 하나인 작가 페터 바이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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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의 작별' 독일어 책.

 

배수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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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eatimes.net/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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