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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남자, 기억을 앓는 여자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03 2025 08:07 PM
미셸 프랑코 감독 영화 ‘메모리’ 채스테인·사스가드 명연기에 젊은 거장의 빼어난 연출 압권
실비아(제시카 채스테인)는 어느 날 고교 동창회에 간다. 한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실비아는 겁에 질려 행사장을 급하게 빠져나온다. 남자는 집 앞까지 쫓아오고 밤새도록 주변을 서성거린다. 실비아의 옛 연인일까, 습관성 스토커일까.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실비아는 날이 밝자 남자에게 말은 건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실비아를 왜 따라왔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실비아와 사울(피터 사스가드)은 그렇게 기괴한 첫 만남을 갖는다.
실비아는 고교 동창회에 갔다가 낯선 남자 사울을 마주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티캐스트 제공
사울은 초기 치매 환자다. 아내는 죽었고, 동생의 보호 속에 함께 산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실비아를 따라갔다. 실비아가 죽은 아내를 닮아서였는지, 한눈에 반한 것인지, 아니면 지인이라고 착각했는지, 또는 무의식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실비아는 그런 사울에게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혹시 고교 시절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일행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비아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가족에게도 암시만 할 뿐 쉬 꺼내 놓지 못하는 과거다. 그는 옛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으나 후유증이 오히려 그의 삶을 옥죈다. 집 문을 이중삼중으로 매번 걸어 잠그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속 지옥을 가늠할 수 있다.
실비아는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산다. 여동생도, 어머니도 그에게는 사랑보다 증오의 대상이다. 티캐스트 제공
실비아와 사울은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둘의 감정 교류는 역설적이다. 실비아는 과거를 잊고 싶은 반면 사울은 옛 시간을 떠올리고 싶다. 실비아는 사울과 함께 하며 행복한 기억을 새록새록 쌓아가며 옛일을 조금씩 지울 수 있는데, 정작 사울은 먼 시간의 일을 더 잘 기억한다.
실비아와 사울은 어느덧 서로 눈을 마주하는 사이가 되고 현재를 서로에게 맡기게 된다. 티캐스트 제공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과거도 미래도 실비아와 사울에게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지금 이곳에서 서로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하다. 영화는 사랑도 인생도 예측 불가능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현재를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의 최근작이다. 프랑코 감독은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은 ‘애프터 루시아’(2012),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크로닉’(2015),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뉴 오더’(2020)로 젊은 거장 칭호를 듣는 이다. 인간관계와 심리, 행동을 세밀히 묘사하며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는 데 빼어난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그의 연출력은 ‘메모리’에서도 여전하다. 프랑코 감독은 ‘메모리’에 대해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연기 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타미 페이의 눈’(2021)으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채스테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새 삶을 도모하는 실비아는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구체성을 얻는다. 사스가드는 체념과 관조 사이 놓인 듯한 이의 모습을 구현하며 채스테인의 연기에 화답한다. 사스가드는 이 영화로 2023년 베니스영화제 남자배우상을 받았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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